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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Mar 27. 2021

커피 한 잔의 거리두기

영화를 쓰다 5 - 「인터스텔라」, 핸드드립으로 우주를 담다

 

1. Interstellar.
 
 우주에서 별과 별이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핸드드립 커피를 내릴 때에도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물과 원두 사이의 거리, 포트와 드리퍼 사이의 거리, 그리고 드리퍼와 유리잔 사이의 거리.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의미하는 '인터스텔라'처럼, 핸드드립 커피는 이들 사이의 거리두기를 통해 내려진다.

 이 거리는 에스프레소처럼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되고 콜드 브루처럼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참을 수 있는 정도의 중력으로 서로를 밀고 잡아당기는 별과 별 사이의 적당한 거리처럼, 묵직한 중력이 만들어낸 웜홀을 통해 단숨에 여행할 수 있는 우리 은하와 너희 은하의 적당한 거리처럼, 깊은 빛 한잔 아름다운 향 한잔을 위해선 'Interstellar' 같은 묘한 거리가 필요하다.
  

핸드드립 커피는 별과 별 사이의 깊은 '거리두기'를 통해 내려진다.

 
2. Gravity.

 지구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힘이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게 한다. 핸드드립은 중력만을 이용한 가장 자연적인 추출 방식이다. 가히 '중력적이고' 과연 '우주적인' 추출인 것이다.
 산소처럼 투명한 물줄기는 중력으로 포트의 입술 위에서 자유낙하하고, 중력으로 '허블  필드(Hubble Deep Field)'처럼 촘촘한 커피 입자를 깊게 적신다. 이윽고 어두운 색으로 변한 물줄기는 중력으로 투명한 유리잔에 흘러, 중력으로 한잔의 웅장한 우주를 내린다.

 
 중력이 이 별의 백삼십 프로이거나 팔십 프로인 별에서는 전혀 다른 빛과 향으로 내려졌을 단 하나의 우주. 웜홀 너머 또 다른 은하계에선 저마다의 중력으로 내려지지만, 바닥 없이 영원히 추락하는 무중력의 암흑물질 속에선 절대 내려지지 못했을 중력의 산물. '커피가 내려진다'는 말처럼 중력적인 표현은 아마 다른 은하에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핸드드립 커피는 적당한 '거리(Interstellar)'와 적당한 '중력(Gravity)'이 은하와 은하 사이에서 만날 때 비로소 '내려진다(Drip)'. 이 우주적이고 중력적인 커피 한잔은 'Interstellar Gravity Hand Drip Coffee'라는 이름으로 카페의 테이블 위에 향기롭게 올려진다.

  

'Interstellar Gravity Hand Drip Coffee'

 
3. Murphy's Law.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우주의 법칙처럼, 이미 흘러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을 지연시키더라도 이미  방울의 카페인이 되어 유리잔 속으로 떨어지게  물은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고, 시간을 역행하더라도 이미 헛된 수증기가 되어 뜨겁게 식어가고 있는 커피 한잔과 유리잔 경계 너머의 차가운 겨울 공기의 엔트로피는 반드시 증가하게 되어 있다.
 지금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중력으로 한잔의 우주를 내리고 있는 청년은,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하더라도 핸드드립 커피 한잔을 내리는 동안만 잠시 우주를 구부릴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투명한   방울이 되어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 너머로 나선을 그리며 향기로운 블랙홀 속으로 천천히 스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드리퍼의 작은 웜홀 구멍을 통과하는 순간 그는 한 방울의 커피로 변하여, 과거를 유영하는 유리 은하 위로 떨어질 것이다. 유리잔 속은 어린 시골 소년의 작은 은하가 되겠지. 수정같이 맑은 은하 바다의 표면 위로 연어 떼가 별무리가 되어 헤엄치고, 5차원의 팽팽한 초끈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바닷속 깊은 방에는 청년을 닮은 소년이 돛단배 모양의 침대에 앉아 바벨의 도서관 같은 은하 속을 항해하고 있을 것이다.
 어린 소년의 은하와, 순수함을 잃은 청년의 은하. 두 은하 사이의 거리는 우주에서 가장 먼 거리지만, 청년은 그로 하여금 커피를 내리게 한 근원적인 힘에 온몸을 맡기고 커피 속에서 소년을 마주하게 해 준 중력의 끈을 살포시 건드려 어렴풋이 소년을 불러 보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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