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
나는 엄청난 기분파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둥실둥실 떠올라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도 기분이 좋고, 숨 막히게 더운 날씨에 등줄기에 흐르는 땀마저 기분이 좋다.
반대로 말하면 기분이 안 좋을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진창에 처박힌 기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속수무책으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즐거울 리가 없다.
그렇기에 나는 기분이 내리막으로 완전히 가속페달을 밟아 치닫기 전에 몇 가지 부비트랩을 심어둔다.
스스로를 귀한 사람 대접하듯 몇 가지 장치를 해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값나가는 부라타 치즈를 사서 잔뜩 멋부린 플레이팅으로 식탁에 올린다거나, 쓸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꽃 한 송이 산다거나, 모든 집기를 쓰기 편하게 호텔식으로 정돈해 둔다거나, 이불 세탁 후 건조기에 바싹 말려 따끈하고 뽀송할 때 얼굴을 파묻는다거나. 등등.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대접을 해주는 거다. 혹자는 스스로 북치고 장구치는 꼴이 우습지 않냐 할 수도 있지만, 해 본 바로는 뻔뻔하게도 기분이 나아진다.
여러 가지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의전(?)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치트키로 나만의 행복세트를 실행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좋아하는 주류와 마스다 미리의 책을 세팅하고, TV로는 좋아하는 영화를 틀어둔다. 그런 날에는 ‘남극의 쉐프’, ‘안경’, ‘카모메식당’처럼 같이 악역도, 클라이맥스도 없이 흐르듯 볼 수 있는 영화여야 한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카톡으로 엄마와 친구들에게 오늘 기분이 꿀꿀하다고 보내본다.
득달같이 달래주는 이들까지 합심하여 안 좋았던 기분을 완전히 몰아낸다. 단순히 기분의 문제라면 대게 그날을 넘기지 않고 해결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기분파인건 사실이지만, 기분에 휘둘리는 내가 싫을 때에는 적당히 제어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어른이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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