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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Oct 19. 2024

13. 장마

낭만과 불안의 경계에서


제주는 수해가 거의 없다.

바닷가에 살거나 내천 근처에 살지 않는 이상 비가 집으로 들이칠 일이 없다.

대학 시절에도 비로 인해 크게 위태로웠던 적은 없다.

비, 더 나아가 자연재해에 대한 직접적인 공포를 느끼게 된 것은 두 번째 자취방, 옥탑방에서의 여름이었다.


탁 트인 시야, 햇볕은 가깝고, 작은 마당(?)도 있고, 바람도 솔솔 잘 통해서 이사할 때 기분이 참 좋았다. 그 때문인지 떠올려보면 불편했던 일이 많았는데, 그 당시엔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더랬다.

그러다 장마철인 어느 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옥탑방이지만 벽이 얇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그날 따라 천장 벽이 아닌 천막으로 비를 겨우 가린듯한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벽이 뚫릴 일은 없겠지만 한 번 의식한 공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그날 깊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천장 벽지의 이음새를 바라보았다. 혼자 어찌할 도리 없는 공포감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핸드폰 메모장을 켜 일기를 썼다.

그날의 일기에 나는

세차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강보에 둘둘 싸여 구덕에 뉘인 채 강에 버려진 느낌이다.

라는 등의 표현을 썼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나 혼자 해결해야 하니 물이 새기라도 하면 출근은커녕, 일상생활로 복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불안에 떨기도 했다. 누수되어서 전기가 나간다면 당장 세수는 어떻게 하지, 집이 침수된다면 보상은 어떻게 받고 침수 피해를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가 등.. 이런 현실적인 걱정들로 또 몇 시간을 뚝딱 허비했다.


장마철 쏟아져 내리는 비는 어찌보면 참 통쾌할 만큼 시원하기도 하지만, 그도 내가 안전지대에 있을 때만이 누릴 수 있는 낭만이다.

이제 옥탑방에 살지는 않지만 올해도 나는 쏟아지는 비에 잠시 불안했고, 다가올 가을철 태풍에 마음 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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