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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an 11. 2021

남은 시간이 어떻게 되나요?

사노 요코, <죽는 게 뭐라고>

그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파트리크 쥔스킨트, <문학의 건망증>





언제 출간되었는지 연도가 써 있는 그다음 페이지에 적혀 있는 구절.

'사람은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다.'


그때서야 나는 이 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걸 인정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을 때 자주 되뇌던 말이다. 사람은 죽어 가는 것이지 죽는 순간까지는 살아 있다, 그러니 죽는 건 아주 짧은 순간이며, 우리는 그때까지도 행복해야 한다고 말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내가 깨달은 말인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이것은 오래전 읽었던 '사노 요코'의 <죽는 게 뭐라고>에 나오는 말이었다.


책을 읽어 무엇하느냐고, 어차피 다 까먹지 않냐 했는데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말처럼 책 속의 말들은 내 몸에 흡수될 대로 되어서 변화한 걸 나만 모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난 다시 읽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1. 70세가 적당할까?


일흔 전후는 딱 좋은 나이다. 아직 그럭저럭 일할 수 있고, 스스로의 뒤치다꺼리를 할 수 있다.

나는 착하게 살아왔음이 틀림없다. 하느님도 부처님도 분명히 존재하며 나를 제대로 지켜봐 준 것이다.


이승을 떠나는 적당한 나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친할머니는 살아 계시는 동안 응석 부리듯 자주 말씀하셨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그건 죽기에 알맞을 나이라는 것도 아니고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 자기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삶의 자세였다.


언제 죽어도 생에 아쉬움과 미련이 남을 것 같다. 버스정류장에서 나와 같이 버스를 기다리던 60대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바라봤다. 그리고 우리들 앞으로 20대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지나갔는데, 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저분들은 저 청년의 젊음이 배가 아프도록 부럽지 않을까?' 내가 60대가 되면 젊음이 무척 부러울 것 같기 때문이다. 더 살아갈 날이 많다는 확률과 자신감이 눈물겹도록 부러울 것이다. 반면 그때의 나는 조금씩 마음을 버리고 정리하고 끝을 생각하지 않을까. 서럽게, 서럽게.


그런데 칠순이 적당하다니. 정말 그럴까. 죽음 앞에서 딱 적당한 때에 떠난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까. 공지영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생이 좋은가 나쁜가의 문제는 결정의 시점을 어디서 잘라 바라볼까의 문제일 뿐이다. (중략) 그러므로 마지막 순간 인생을 잘 살았다 생각하고 죽기 위해서는 죽는 순간까지 어떻게든 행복해야 하겠지.


죽는 순간까지 행복하다면 적당한 때에 떠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정작 지금은... 칠순이 되려면 약 사십 년, 아니 내가 살아온 만큼만 더 살면 되는데... 어쩐지 난 그게 너무도 짧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내가 뭘 해 왔던가. 뭔가를 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니었나. 그런데 이만큼만 더 지나면 칠순이라니. 사노 요코 씨가 말한 적당한 칠순 말이다.


아직 칠순이 적당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삶을 떠나는 적당한 시기 혹은 나이쯤을 생각해 두는 건 좋을 것 같다. 그래야 떠나는 순간 억울하다든가, 아쉽다는 말을 덜 내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정해둔 시간 이후까지 살 수 있게 되면 그것은 덤으로 얻은 생명이라 여기고 다시 한번 열심히 살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은 용기가 필요하다, 시기를 정하는 것에는.





2. 진짜 무서운 건 무엇일까?


암 따위로 으스대지 마시길. 훨씬 고통스러운 병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류머티즘이나 진행성근위축증도 있고, 죽을 때까지 인공투석을 해야 하는 병도 있다.


암이 제일 무서운 병인 줄 알았다. 나와 가장 가깝지 않고, 주변에서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먼 일인 만큼 멀리서 봐서 더 겁이 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까이 봐서 무서워졌다. 내 주변에 암이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는, 혹여나 여기에도 암이, 여기에도 암이 있는 건 아닐까 기웃거리며 미리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미리 걱정한다고 그 일이 닥쳤을 때 놀라지 않을 리 없건마는 내 마음은 자꾸 미리 놀라지 않도록 생각하고 상상하게 했다.


개인적으로, 암이 무서운 이유는 그로 인해 닥칠 각종 외로움 때문이다. 일단 치료가 가능한 곳부터 내가 스스로 알아봐야 한다. 찾아다니고 알아보고 검사를 받고 검사에 적응하고. 온통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혼자 해야 한다면 당연히 외로울 것 같다. 가족이 함께 해 준다면 미안해 죽을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치료 과정에서 자주 우울함을 내비치고 가라앉을 것만 같다. 끝나는 순간은 한순간인데 그 순간을 맞이하기까지의 긴 시간을 온통 죽은 시간으로 보낼까 두렵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사노 요코 씨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암보다 무서운 병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외로움. 그리고 우울.  


인생이란, 나 자신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스스로 잘 정리해둔 덕분이겠죠.


의사는 사노 요코 씨에게 인생과 나, 그리고 죽음에 대해 정리를 해 둔 덕에 죽음에 대한 받아들임이 남과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나에게 인생이란 무엇이고 나 자신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찾으면 죽음에 대한 정의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우선 나는 외로움과 우울을 기피하고 두려워한다.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독이라지만 나는 어찌 되었든 피하고만 싶다. 그게 제대로 되지 않는 날은 슬펐고, 그것이 제대로 된 날은 행복했다. 결국 외로움과 우울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나만 죽는다는 생각 때문일 거다. 지금, 나만, 여기서 말이다. 만약 죽음으로 가는 길에 따스한 이들이 곁에 있다면, 나는 꽤 행복한 삶을 살아왔고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무서운 건 혼자라는 생각이고, 외로움이고, 우울이니까.


두 번째로는 집이다. 요시타케 신스케의 <나도 모르게 생각한 생각들>에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을 어떻게든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뒷담화를 하고, 그가 돌아오면 또 다른 이의 뒷담화를 하면서, 어떻게든 오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목표라면, 뭐 그럭저럭 좋지 않을까요. 결국 인생이란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는 게 목표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다. 오늘 아침에 '죽음'에 대한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읽으며 하루 종일 기분이 가라앉았다. 생각을 떨쳐내려 했는데 자꾸만 그 생각을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또 가라앉고 가라앉았다. 어쩐지 죽음에 대해 파고들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서웠다.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신기하게도 현관문을 열자마자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밥 한 그릇 뚝딱 먹고 나니 가슴이 환해지고 그동안 내가 한 생각들이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떨쳐내려 했건만 되질 않더니. 그때 깨달았다. 나의 인생은, 이 편안한 집에 돌아오는 것뿐이었단 것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난 집에 돌아오는 게 하루의 평안이었고 하루의 끝이었다. 모든 시작은 저녁에 집에 돌아오기 위함이었다.


이 두 가지를 종합해 보면 나에게 인생이란 사람들 곁에 있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 이게 다다. 인생을 거창하게 보내야 한다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더 잘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더 변화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 적은 많다. 그런데 삼십 년을 넘게 이렇게 살았으면 이미 인생의 큰 줄기는 가닥을 잡은 것 아닐까. 나의 인생은 이렇다. 사람들 곁에 있는 것,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만 잘하면 이 삶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그래도 '잘 살았다'라고 미소 지을 수 있을 지도......




3. 50대라니, 얼마 남지 않았다.


훌륭하게 죽자고 결심했다.

훌륭한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노 요코 씨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당연히 겪어야 할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라는 거다. 게다가 자신은 자식도 다 키웠고, 나이도 70대니 죽는다고 통곡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


그런 생각이 멋있다. 죽어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겠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아니 심지어 훌륭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은 아무나 할 수 없다.


나 역시도 훌륭하게 죽자고 결심해 본 적은 없다. 다만 죽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소원한다. 인간이 겪어야 할 모든 고통들을 잘 견뎌내고 겪어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이다.


아까의 말에 이어서 내가 죽음을 잘 겪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그래요. 유전자에 지배당해서 쉰다섯이 넘으면 육체적, 정신적인 욕망도 쇠퇴합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활동할 수 있는 인생이 짧다'라는 사실을 의외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사노 요코 씨가 70대가 죽기에 알맞다고 했을 때도 70이란 숫자가 되려면 내가 살아온 만큼만 한 번 더 사는 거라고, 그것은 그리 긴 시간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는데, 이번엔 50대라니.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어 초조해졌다.


유전자에 지배당해서, 그것도 운이 좋으면 '17년'이란 시간이 내 앞에 있다.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앞으로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보내고 싶다.

왜 여태까지 사람들과 싸우고 삐지고 토라지며 시간을 보냈는지 모르겠다. 나는 외로움과 우울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들과 많이 웃으며 많이 눈을 맞추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들이 날 거부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의 시간에서는 내가 그들을 거부하며 삐지고 토라지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다가가길 겁내 했다. 이제는 겁만 먹고 가만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다. 좋으면 좋은 대로, 더 다가가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테다.





죽은 자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기에 사후의 명성 따위는 당사자에게 가치가 없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죽은 자신에 대해 슬퍼할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리하여 장자도, 몽테뉴도, 세네카도, 루크레티우스도 입을 모아 말했다. 살아 있지 않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한다면, 태어나기 이전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해야 한다고. 키케로는, 바위 위에 누군가 죽어 있다면, 그 죽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바위가 더 고통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죽은 후의 '나' 자신에 대해서는 그만 생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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