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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an 10. 2021

이야기한다 해서 읽을 확률은 높지 않다

이수은의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

"선생님, 그때 말씀하신 책 말이에요..."


수업을 하던 도중 ㅈ은 나에게 책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저번에 수업하다가 책 이야기를 했었나 보다. 수업 도중 책 이야기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기에 내가 무슨 책을 ㅈ에게 이야기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책을 말하는 거냐고 되물었다. ㅈ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을 이야기했다고 답했다. 그때서야 기억이 났다. 수업을 하던 도중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 재밌다고 하면서 <신>도 괜찮았다고 말했었다. ㅈ은 <개미>는 들어봤는데 <신>은 모른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래서일까. ㅈ은 내가 이야기한 <신>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중이라고 했다.


"대박이지? 엄청 재밌지?"

"음......"


"음......"이라고? 살짝 당황했다. 추천했던 책을 학생이 직접 읽는 경우는 흔치 않기에, 고객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망이 불타올랐다. 그래서 나는 간략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이게 전체 6권이야. 그러니 3, 4권은 읽어야 재미를 느껴."라고 말했다. 조금 설득이 된 듯하다.


나는 수업 시간에 책 이야기를 자주 한다. 내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재미가 있으면 있다고, 없으면 없다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수업과 관련되어서 읽은 책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의 경험만으로 수업을 재밌게 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나의 경험만으로 작품을 이해시키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들의 반응은 매번 다르다. 내가 책 이야기를 하면 마치 자기가 읽은 느낌이 든다며 좋다는 학생도 봤고, 지루하다는 학생도 봤으며, 이야기한 책을 사서 읽는 학생도 봤다. 반응은 항상 다양하지만 항상 뿌듯한 건 책을 사서 읽는 경우다.


이처럼 이야기한다고 무조건 상대방이 책을 사서 읽을 확률은 높지 않다.





<실례지만, 이 책이 시급합니다>는 다양한 상황에서 읽을 수 있는 책들을 추천한다. 목차가 무척 재밌다. '가슴속에 울분이 차오를 때는', '사표를 쓰기 전에 읽는 책', '통장 잔고가 바닥이라면' 등의 상황에 맞는 책이 추천되어 있다. 처음에는 추천된 책들의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이미 읽었던 책이었다면 저자가 소개한 것처럼 정말 그런 책이었던가 생각해보게 되었고, 처음 보는 책이었다면 흥미를 갖게 되었었다.



불행에 빠진 사람이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보면서 위로받는 마음은 인간적이다. 하지만 나의 불운한 처지에 다른 누군가 안도하고 있다면, 그때도 인간적이라고 여겨줄 수 있을까. 자신의 불행에만 골몰하면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위험한 사람이 되고, 자신의 행복에만 골몰하는 사람은 부도덕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 사회를 이뤄 살아가는 존재인 한, 우리에게는 서로 들키지도 드러내지도 말아야 할 인간성의 그늘이라는 게 있다.


수업 시간에 여러 번 다루었던 <태평천하>를 읽으며 저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었다. 단순히 윤 직원이란 사람이 참으로 무지하다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오늘날 뉴스를 멀리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기 싫어서, 다른 사람이 겪은 끔찍한 이야기로 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나만의 행복을 높이고 싶어서. 그 무슨 이유를 대도 이기적일 뿐이었다. 윤 직원과 내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란 걸 나는 왜 여태 몰랐던가.





누구에게나 아무리 사소해도 안 하고 싶은 일은 있다. 그런데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하고 싶지 않은 것들 중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는가? 안 하고 싶은 마음인가, 어울리고 싶은 마음인가.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성격상 무리에 잘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들만 사회생활이 힘든 건 아니다. 누구와라도 금세 가까워지는 듯 보이는 사교적인 사람도 인간관계가 가장 피곤하다고 말한다. 타고난 기질이 절대 요인이 아니라면,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나의 선택 아닌가. 내가 사람들과 못 어울리는 이유도, 그렇게까지 어울리고 싶은 건 아니어서였다. '아싸'의 시작은 마이웨이. 이것이 깨달음의 서막이었다.


<필경사 바틀비>는 '중학독서평설'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장의 요구에 바틀비는 당당히 "안 하고 싶습니다만."이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가 인상 깊었다. 나는 거절하고픈 나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한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대체로 거절하고 싶을 때 표정이 얼거나 대답이 안 나오거나 머뭇대거나 했을 뿐이다. 말로 "안 하고 싶습니다만."이라고 한 적은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현실에 존재하기도 어렵겠지만 존재한다 한들 나란 사람은 당당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지도 미지수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바틀비가 대단하다고 여겨지면서 부러웠었다. 그런데 저자의 말은 마냥 부러워만 한 나와 다르다. 그것은 선택이라는 거다.


그제야 나의 운명이 아니라 '선택'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왜 혼자인가, 나는 왜 외로운가, 나의 지인들은 왜 점점 줄어들기만 하는 걸까. 이 모든 게 그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들으니 그것은 '선택'일 수도 있겠다. 지인이 많기를 바란 적은 없다. 소중한 사람이 많기를 바랐다. 소중한 관계가 되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소중한 사람이 적다. 게다가 낯을 가려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고,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 나누는 것에 머뭇댔다. 그건 내가 선택한 것이었다. 이걸 몰라서 여태까지 운명을 원망하고 주변 사람들을 탓했다니. 어리석은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추천되는 책들이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추천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추천을 듣고 있는 나 자신의 문제였다. 그만 먹고 싶은데 맛있지? 맛있지? 하면서 상대가 떠 준 음식을 계속 입에 넣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아무튼 맛있긴 했다. 그러나 배가 부르니 당장은 먹을 수 없겠다.


 역시, 이야기한다고 무조건 상대방이 책을 사서 읽을 확률은 높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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