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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an 15. 2021

역지사지: 너도야? 나도 깜깜하단다

안 들리고 안 보여요

초등학생 때부터 배운 영어는 시간이 지나도 제자리다. 여전히 안 들리고 여전히 입이 안 떨어지니 말이다. 그래서 새해가 되어 다짐한 것 중 하나는, 영어를 공부하자이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주저스러운 마음일 때 우연히 손미나 씨의 유튜브를 보게 됐다. 그녀는 제일 먼저 매일 영어를 들으라고 강조하며 CNN 방송을 듣는 것도 추천했다. 그래, 하나도 들리지 않아도 자주 듣는 게 제일인가 보다. 새로운 마음을 먹으며 CNN 방송을 틀었다.


안 들린다.

그들의 흥분한 억양, 시끄러운 현장 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단어들. 그것이 내가 들은 전부였다. 그리고 한국에 보도된 그들의 사정으로 추론할 때 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뉴스가 아닐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는데... 들려오는 소리로 알아들은 게 아니라 온갖 잡지식을 동원하여 알아맞추다니 조금 씁쓸했다.


그렇게 뚫리지 않은 귀를 가지고 출근을 했는데

학생과 독서 지문을 읽다가 문득 떠올랐다.


어라, 이 학생은 눈이 안 뜨였구나!


학생이 독서 지문을 하나도 읽지 못했다. 세 줄의 내용을 다섯 번 반복해서 설명해줘도 그의 눈엔 총기라곤 없었다. 흐리멍덩함과 복잡함,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만 전달되었다. 그때쯤 같은 지문을 다섯 번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 '아 이 정도 하면 알아들을 법하지 않나...' 하면서 답답해하고 화가 났는데 불현듯 떠오른 거다.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 내 귀와

글씨가 들어오지 않는 그의 눈을 말이다.


영어가 안 들려 답답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워도 뭐라고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러니 영어는 재미없었고, 멀리하고만 싶었고, 나중엔 타협했다. 외국어쯤 모른다고 해서 사는데 큰일이 나진 않아.


그도 그럴 것이다. 국어 지문 못 읽는다고 해서 사는데 큰일이 나지 않아.

그리고는 내가 영어를 포기했듯이 그도 포기하지나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곧바로 내 귀의 상태에 관해 그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너의 마음을 안다, 그 답답한 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 같이 해 보자.

너는 글을 읽거라, 나는 들어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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