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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Mar 18. 2021

선생님께선 아직 메일을 읽지 않으셨다

담담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날을 기다리다 어느덧...


선생님께 메일 주소를 여쭤본 게 1월이었다. 새해가 되자 선생님께서 ‘먼저’ 안부를 물어봐 주셨는데, 그 당시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 마음이, 내가 처한 처지가 그러했다. 은밀한 속내와 무거운 속내를 적절히 섞어, 어렸을 때 했던 것처럼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의지하고 싶어 메일 주소를 여쭤봤다. 그런데 아무래도 보낼 수 없었다. 무겁기만 할 것 같아서. 선생님께 괜한 걱정을 끼쳐드릴 것 같아서. 어렸을 때 선생님께 아무 고민 없이 어떻게 속내를 밝힐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투명하게 다 보여드렸다. 그만큼 선생님을 믿었고, 존경했으니까. 철이 없기도 했고.



마음속으로 선생님께 메일을 보내자, 보내자 자주 되뇌었다. 벌써 1월이 끝나가네, 2월이 시작됐네, 이제 3월이잖아, 하면서 쓰자 쓰자 했었다. 그런데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다. 도서관에 다녀오는 길, 날이 따뜻했고 평소와 똑같이 선생님께 보낼 말들을 머릿속에서 고르고 골랐다. 안녕하세요,라고 보낼까. 선생님 날이 화창합니다,라고 시작을 할까. 은밀한 속내에 대해 이야기해도 될까. 아니면 사회생활하듯이 괜찮은 모습만 보여 드려야 할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서관에서 집까지 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일단 쓰자,

싶었다. 말을 고르지 말고

일단 쓰자.


그리고 썼다.



삶은 이렇게 우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계획하고 계획해도 정작 그것을 실행하는 건 우연이고 우발이다. 치과에 간 일도, 선생님께 메일을 보낸 것도 모두 그렇다. 앞으로 남은 숙제 하나도 그리될 것이라 믿는다.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은밀한 속내를 담았지만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담담하게 써 내려갈 수 있다니 다행이었고, 오늘처럼 담담하게 쓸 수 있길 나 자신이 기다렸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됐다.



맨 마지막에 난 이렇게 적었다.

‘선생님과 계속 연락하고 싶은 제자 드림’



선생님께선 아직 메일을 읽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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