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olpit Apr 16. 2021

온 우주가 힘을 내는 날 돕는다

펜, 드라마, 책과 딸기 우유


펜심을 주문했다. 검은색과 파란색을 각각 다섯 개씩 주문했는데, 파란색 펜심을 넣을 파란색 펜이 없었다. 파란색은 처음이다. 그래서 검정펜에 파란색 심을 넣을 생각으로 주문했다. 파란색 펜심을 산 이유는 노란색에 있다. 요즘 책에 노란색 형광펜으로 밑줄 긋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노란색과 어울리는 파란색이 떠올랐다. 책을 읽다 드는 생각들을 연필로 적었는데 지금은 거기에 파란색 펜으로 주저리주저리 적어 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파란색 펜심을 어서 사용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검정펜이 아니라 거의 다 쓴 빨간펜에 파란색 펜심을 넣었다. 묘하다. 빨간색에서 파란색이 흘러나온다. 이건 겉만 빨강이다, 빨강이다 되뇌어도 자꾸 종이에 흘러나오는 파란색이 엉뚱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특별해 보이기까지 한다.



펜심을 샀다고 지인에게 이야기를 하다가 "저는 펜 욕심이 있어요."라고 고백해버렸다. 그러면서 분홍색, 보라색, 초록색, 노란색, 하늘색의 펜이 있다고 말했더니 지인은 분홍색은 써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중, 고등학생 때부터 쓰던 색인데 써 본 적이 없다니. 사람의 경험은 이처럼 다양하다. 문득 지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분을 느끼고 싶으면 분홍색 펜을 일주일 써 보는 건 어때요? 하고 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의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것은 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소한 것들로 힘을 얻고 새로워지고 싶은 건 나였다. 여전히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결론은 죽음으로 끝나는 무서운 책 같다. 그러나 한편으론 90세이신 할머니를 생각한다. 최근에 만난 선생님의 '명랑하게 늙기'라는 목표를 생각한다. 언제가 끝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그동안은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두 사람으로부터 내가 배운 것이다.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기요 씨는 우울하게 살기보다는 밝게 살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어.'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 그게 아니면 의미 없다.'


기요 씨처럼 밝게 살기로 '결심'하면 어떨까. 그래서 전주초록이에게 자신이 하는 습관 중 하나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라 해도 나에겐 처음인 것들이 있을 테니까.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것이므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면 마음이 조금씩 밝아진다. 그럴 때 나는 내가 동물임을 자각한다. 햇빛이 많아지자 스멀스멀 마음에도 빛이 들어오고, 그러다 완연한 봄이 오면 다시 느슨해진다. 이대로 삶을 낭비해버릴 것 같고, 여전히 반복적인 생활 속에서 즐거움은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불길함이 다가온다. 그렇지만 다시 연둣빛 세상인 오월이 다가오면, 스멀스멀이 아니라 왕창 마음에 빛이 들어온다. 힘을 내라고, 새 마음을 먹으라고.

새 마음을 먹자 온 우주가 도와준다. 도서관에 갔다. 며칠 전에 연체된 도서를 반납했기 때문에 대출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문제를 풀려고 했다. 그런데 집에서 읽기 싫은 지문은 도서관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문단을 읽자마자 정신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정신을 붙잡아 오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잠도 깰 겸 책 구경을 했다. 이런 책을 빌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빌릴 수 없는 신세 아니던가. 단념하고 가방을 쌌다. 문을 나설 때 사서 분께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연체를 하고 그 다음날 바로 반납을 했는데요, 언제쯤 대출이 다시 될까요?" 사서 분은 말했다. "연체 풀리신 것 같던데. 그리고 4월은 행사가 있어서 연체 바로 풀려요. 지금 빌리실 수 있어요."



이런 기쁜 소식이 다 있나. 여태까지 항상 기쁜 소식을 기다렸다. 무엇에 관한 특정한 소식도 아닌 그저 기쁜 소식. 그러니 기쁜 소식이 들려올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서 그것을 계속 기다렸는데, 오늘 이것이 기쁜 소식처럼 느껴졌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영역의 기쁜 소식. 사서 분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책장으로 뛰어가 책을 손에 집기 시작했다. 빌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빌려 가고 싶은 책이 눈에 더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정세랑 작가와 김신지 작가의 책이다. 하나는 읽어 보고 싶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서관 와서 발견한 책이다. 품에 가득 품고 집으로 올 때, 나이가 들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 도서관에 가서 구경을 하다가 우연히 집게 되는 책이라는 건 꿈꾸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가 되면 가까운 사람에게, 이런 책 좀 빌려다 줘 혹은 이런 책을 읽고 싶어,라고 정확히 이야기해야 할 테니, 우연히 손에 들게 된 책은 건강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온 세상이 연둣빛으로 물들어 이제 여름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 여름에 맞춰 오랜만에 실을 꺼내 들고 실 팔지와 실반지를 만들었다. 도서관에 들러 우연히 책을 빌리게 되었고, 불현듯 생각난 샌드위치 덕에 먹지도 않던 딸기 우유가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빨간펜 속에서 파란색이 흘러나오는 건 신비롭다.



온 우주가 힘을 내라고 돕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이상을 버리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