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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Apr 24. 2021

기분이 바뀐다

학생들을 만나면 기분이 바뀐다


기분이란 게 쉽게 바뀐다. 김신지 작가의 에세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보았다. 내가 생각한 말이 책에 있을 때 난 그 구절에 밑줄을 긋는다. 기분이란 게 쉽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그러나 말로 쓰인 걸 보자 느낌이 다르다. 난 기분이 쉽게 바뀌는 사람이다. 방금만 하더라도 어머니의 몸 상태를 걱정하고, 늙음이란 게 뭔지, 죽음이란 게 뭔지 생각하느라 기분이 우중충했는데,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웃음이 났다. 보충이라고 다들 학원에 있었는데, 아마 각 개인은 피곤과 짜증을 짊어지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도 다 같이 모인 학원이란 장소는 활기를 띠었다. 평소 주말에 출근을 하는 나로서는 사람이 없었던 그동안의 학원보다는 학생들이 바글거리는 지금의 학원이 훨씬 더 좋아 보였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활기란 건 뭘까. 신비롭다.


 


나는 일하는 게 좋다. 괴롭지 않다. 누구는 회사를 그만 두고 싶다고 하고 누구는 억지로 일을 한다고 하지만 나는 내 일에 나름 만족한다. 다만 이 나이에 적은 돈을 벌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은 끊이지 않는다. 나이가 젊으니 아직 더 벌어야 하는 건 아닐까, 내가 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한 번씩 생각하게 된다. 미래는 불확실하다. 밝은 내일을 상상하진 않는다. 오늘과 같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밝은 내일이다. 따라서 내가 이야기하는 불확실한 내일은 불행을 말하는 거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나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일이 들어오는 대로 모든 것들을 수용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몸과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다. 이번 시험 기간에만 해도 두 번의 과부하가 왔다. 일정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보충이 있는 날 그것을 잊었고, 1시에 시작하는 보충도 잊었다. 나라는 사람이 허술해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난 내 편이다. 내가 나를 두둔한다. 난 피곤한 거다. 몸이 머리에 명령 내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모든 일정을 무시해라." 핑계를 대 보자면 학원 시간표 구성이 수업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에 불편하게 만들어져 있다. 들쑥날쑥한 시간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아 나는 시험기간마다 시간을 착각하곤 하는데, 이건 나뿐만이 아니다. 과부하에 걸린 나를 동료 선생님께서 아시고, 정신을 차리고 매사에 임하라고 충고하셨는데, 그런 선생님마저 수업 시간을 착각하고 출근하지 않으셨다. 우리 모두는 그럴 수 있다. 과부하에 걸리면.




과부하에 걸리는 와중에도 내가 애착을 갖는 수업은 독서반이다. 중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인데, 그들과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한다. 학생들은 대체적으로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건 대체적인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들 중 소수는 항상 존재한다. 며칠 전 ㅅ양이 독서반 수업에 관심을 보였다. 갑작스러웠다. 독서반을 다시 시작한 건 3월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ㅅ양은 독서반에 대해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ㅅ양은 1년 넘게 나에게 보여준 반응이라고는 "네..." 정도였기에 나는 ㅅ양이 책을 좋아하는 줄 몰랐다. 5월이 다가오는 이때 ㅅ양의 관심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원래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야 말을 한 것일까. 어제 ㅅ양의 어머니께서 내가 안내문을 문자로 보내드리자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다. '국어쌤이시죠? ㅅ에게 말씀 많이 듣고 있습니다. 좋은 수업 진행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의상 하는 말이라 생각하면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하는 말들을 그렇게 예의상 하는 표현으로 치부해버리면 상대의 진심은 언제 알게 되는 걸까? 그러니 예의상 하는 말이라도 그것의 진심을 바라보고자 노력하며 좋은 마음은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낫다. 그래서 난 ㅅ양의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고마웠다. 그리고 ㅅ양에게도 고마웠다. ㅅ양의 어머니께 내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 거만 떨지 말고 겸손하게 수업해야겠다. 




학생은 선생님의 영향을 얼마나 받을까. 요즘 들어 학생의 변화를 바라보며 문득 든 생각이다. ㅅ양이 갑자기 책에 대한 관심을 풀어낸 것처럼 ㅁ군은 중학생 때와 다르게 국어 공부에 대해 몰두한다. 변화가 뚜렷해서 눈에 보인다. 심지어 ㅁ군은 나에게 이런 말도 했다. "일기를 써 보려구요." 나에게 받은 영향으로 일기를 쓰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ㅁ군이 점차 나와 비슷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학생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처럼 그들도 '나'라는 사람으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영향을 받을까? 책에 대해 관심이 없던 아이가 책에 대한 이야기에 점차 귀를 기울이고, 책을 한번 읽어보겠다고 이야기 하는 것. 그 변화가 날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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