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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olpit Jun 09. 2021

뜨거우면서 차가운 공기

오늘 어떤 공기를 만나셨어요?

뜨거운 공기가 오고 갑니다. 누군가가 여름에 가만히 앉아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느껴진다고 했었어요. 시원한 바람을 상상했고 그 공기를 한 번 느끼자,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떠올랐습니다. 쨍-할 정도로 차가운 공기 말이에요. ‘쨍’이라는 말이 겨울의 찬 공기와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볼이 얼얼할 정도로 차가운 기운이 있었을 땐 오슬오슬 떠느라 차가움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했는데 한참이 지난 지금, 왜 그때가 떠오르는지. 인간은 모순된 존재입니다.




오늘에서야 피로가 풀린 모양입니다. 도서관에 들러 한 권의 책을 반납하고 무려 네 권이나 빌려 왔습니다. 책을 대출할 때 매번 어떤 책이 있는지 곰곰이 살피자는 마음으로 책장에 다가서는데 어떤 날에는 한 권도 못 고르는가 하면 어떤 날에는 오늘처럼 네 권이나 고르기도 합니다. 무슨 차이인지 객관화할 수 없지만 제 생각에는 저의 기분, 피로 등의 차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처럼 피로가 나도 모르게 풀린 날에는 이처럼 책을 많이도 빌려오는 게 아닐까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는 것―그것이 피로 정도를 나타냅니다.




어제 일이 떠오릅니다. ㅂ군이 기분 안 좋아 보였어요. 인원이 많아져서 그런가, 자리를 뺏겨서 그런가. “오늘 기분 안 좋네~ 반 분위기 ㅂ군이 다 살리는데” 했더니 ㅂ군이 작은 목소리로 농구부 ㅇ군과 다투어서 기분이 안 좋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기분 안 좋겠지 하며 오늘은 ㅂ군에게 장난을 그만하고 배려하자 했는데 중2 아이들이 건강검진 다녀온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어른들만 건강검진은 받는 건 아니에요. 아이들도 학교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오라는 통지를 받는 모양이더라고요. 아이들의 관심은 키와 몸무게였습니다. 그중 다음과 같은 말이 들렸어요. 비만인 학생은 8시간 금식 후 또 검사를 해야 한다면서 누구는 비만이고 누구는 아니라는 말. 저는 비만에 대해 이야기하는 아이들에게 비만인 아이들도 문제없다, 이제 빼면 된다, 너희들은 아직 크는 중이라 비만이고 아니고는 잠시의 현상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뭐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건 제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고 어린 저에게 해 주고픈 말이에요. 커 보니 알겠더군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 자신감이 중요한 거였어요. 그런데 그 말이 제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 말을 들은 ㅂ군이 눈물 닦는 척하더니(장난으로 눈물 닦는 척 자주 합니다.) "선생님이 이러면 자꾸 텐션이 올라가잖아요, 여태 억제했는데~~~" 하더군요. 하하하. ㅂ군의 기분이 좋아졌나 봅니다. ㅂ군은 비만으로 판정되었고 3월보다 4킬로그램이 빠진 채 19시간 금식 후 검사를 했답니다. 제 말에 ㅂ군은 마음이 든든해졌을까요? ㅂ군은 강의실에 들어올 때의 표정과는 다른 웃음이 많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농담도 계속하는 내가 알던 ㅂ군으로.




“텐션이 올라가잖아요”라는 말이 귓가에 맴돕니다. 솔직한 사람은 매력이 있습니다. 당신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다는 말을 저렇게 스스럼없이 할 수 있다니. 저는 왜 그런 말들을 못하고 매번 배시시 웃기만 했을까요. 자신의 기분을 잘 알고 기분 변화도 잘 받아들이며, 남에게 표현까지 하는 ㅂ군을 보며 저는 ㅂ군이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 예감했습니다.




낮에 뜨거운 공기로 온 세상이 가득해도 바람만은 차가웠습니다. 저녁이 되면 선선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대로 되어 저는 시원한 밤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몸에 열이 금방 식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제가 가진 것들을 더 좋아하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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