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괜찮아?

아직 어젯밤에서 벗어나지 못 한 오늘 아침의 모닝페이지

by 엄달님

2025.10.19. 토 8:28


제대로 못 잤다. 어제 나는 길에서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지르고 울었다. 가끔은 낙관적으로 미래를 그리며 꿈을 꾸는 것이 다 무너져버리는 때가 있다. 나는 늘 내가 살면서 미묘하게 중요한 타이밍이 어긋난다고 생각을 했다. 예컨대 신기하게도 내가 학교에 가지 못 한 날엔 항상 엄청나게 재미있거나 역대로 흥미로운 일이 교내에서 벌어지곤 했었다. 또 부푼 기대를 안고 여행을 예약하면 직전 가족에게 큰일이 생겨서 여행을 취소해야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나는 희한하게 여행을 계획하고 무언가를 예약할 때 그곳으로 떠날 생각에 기대에 부푸는 한편 어떤 큰일이 직전에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여행을 가지 못 할까 아쉬운 게 아니라 항상 내가 기대에 가득 찬 무언가를 계획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기곤 하니 이번에 내가 여행을 계획함으로 인해 가족에게 괴로운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묘한 연쇄적 상상인 것이다. 그래서 늘 무언가 예약할 때 여유롭게 취소할 수 있는 상품을 예약한다.


이번에도 다가오는 일본 여행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이 엄습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제 같이 길을 걷던 할머니가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 불안해서 할머니의 왼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손만 잡는 것으로는 예방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잠시 한 눈을 판 사이 이미 할머니는 발이 블록에 걸리고 허공을 날듯이 해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순간 너무 놀란 나머지 한 손은 내가 꽉 쥐고 있었고 나머지 오른팔은 앞으로 쭉 뻗은 이상한 자세로 할머니는 엎드린 채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뒤따라오던 엄마와 아빠가 너무 놀라 우리에게 달려왔다. 다행히 턱이나 이가 부러진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당연히 전신으로 크게 넘어졌으니 이미 할머니는 넋이 나갔고 앞으로 뻗은 오른팔은 움직이기 힘들어했다. 원래가 급한 성질인데 화장실이 급한 바람에 더 급하게 걸어가던 차에 벌어진 일이다. 나는 왠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낙상에 관해선 늘 이성을 잃는다. 할머니는 아주 옛날부터 자신이 걸음이 빠르고 잘 걷는다는 것에 자부심이 강했고 그로 인해 종종 넘어지곤 했는데, 이제 나이가 여든아홉이니 그 횟수가 눈에 띄게 잦아졌다. 작년엔 에스컬레이터에서 뒤를 돌아보다 넘어져 대형 사고가 일어날 뻔했고, 그로 인해 심신이 약해진 건지 그로부터 몇 달 뒤엔 화장실에서 넘어져 발등과 복숭아뼈가 부러지는 사고가 났었다. 할머니는 이제 다친 이유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왜곡해 버리는 바람에 가족들이 혼선을 빚기도 했다. 다친 발이 살짝 회복된 후 어느 날 할머니가 혼자 집에 있다는 소식에 불안해 방문해 보니 이미 한 잔 술을 홀로 마셔 취한 상태였고, 새벽에 화장실에 가던 할머니는 그대로 방에서 대자로 뻗으며 머리부터 넘어졌다. 난 그때 밤새 한숨도 자지 못 하고 할머니의 상태를 살폈다. 얼마 전엔 큰 이모네 집 복층 계단에서 내려오다 굴러 뒷머리가 찢어지는 일도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두 해 안에 벌어진 일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급히 부모님이 할머니를 부축하고 있는 와중에 나는 정신이 나가서 할머니에게 울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천천히 걸으라고 얘기했잖아.'

'분명히 천천히 걸으라고 했잖아.'

'계속 턱에 걸려 넘어질 뻔했으면서 왜 바닥을 안 봐 왜'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너무 아파 보여서, 이미 오줌을 바지에 다 지려서, 부축하며 가는 두 어른도 이미 너무 늙어버려서, 가운데 있는 바지가 다 젖은 할머니가 안쓰러워서 뒤따라가며 엉엉 울었다. 할머니 괜찮아? 할머니 너무 아프지? 괜찮아..? 정말 괜찮아 할머니?


이게 내가 일본 여행을 예약해 놓고 너무 들뜬 탓일까, 아니면 곧 결혼을 하겠다고 신이 나서 부동산 임장을 시작한 탓일까? 괜한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리가 너무 복잡하고 용량이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은 이유 중 큰 부분이 가족에 관한 것들 때문이었는데 오히려 명확해졌다. 아, 이 부분을 풀어내야겠구나. 대신 슬픈 글을 쓰진 말자. 그냥 내 이야길 쓰자.


쓰다 보니 어느새 감기지 않았던 눈이 떠지고 잠이 다 날아갔구나. 바깥에서 엄마와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글자의 강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갈 시간인가 보다. 모닝페이지를 쓰다 보면 미래지향적이게 되고 새로운 창의력이 발산되고 나도 모르던 일들을 알아가게 된다던데. 가끔은 어제의 일이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오늘이 되고, 내일이 되는 경우가 일어나면 미래는 차치하고 당장 지금, 그리고 그 일어난 당시에 대해서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는 그것이 내일이 되다 못해 모레가 되고, 글피가 되고 평생이 되고 인생이 되기도 하겠지. 갑자기 세상에서 잊힌 채 평생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여전히 공항에선 가족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잠 못 드는 사람들이 있겠구나. 실종 아동 송혜희 씨의 아버지께선 천국에서도 혜희 씨를 찾고 계시려나.


우선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자. 나에겐 아직 가족들이 있다, 연인이 있다, 친구가 있다. 혼자가 아니니까. 이제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와 할머니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자. 일어난 척하자. 할머니 제발 다친 부위 그만 만져. 그만 주물러. 엄마 말 좀 들어 고집 피우지 말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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