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그냥, 그냥!

2025.10.18 머리 용량을 비우는 아침

by 엄달님

2025.10.18. 토 9:16


프리랜서에게 주말이 어떤 큰 의미가 있겠냐만은 주말이라고 꽤나 달콤한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밤새 창문을 열고 자서 방 안 공기가 싸늘하다. 감기에 안 걸린 것이 다행이다. 감기 걸릴까 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잤더니만 이불 밖 공기가 차가운 줄도 몰랐다. 암막커튼도 치지 않았는데, 방안이 이미 훤해진 것도 몰랐다. 원래 자면서 많이 뒤척이는데 어떻게 답답해하지도 않고 정수리 끝까지 덮은 이불을 안 걷어냈는지도 모르겠다.


일어나니 허리가 욱신거리고 아프다. 침대를 바꿀 때 괜히 값싼 매트리스를 써도 괜찮다고 했던 것 같다. 매트리스가 별로 안 좋아서 악몽을 꾸나. 오늘 꾼 꿈도 어떻게 생각하면 악몽 축에 속하는 것 같다. 야시꾸리하면서도 이상한 꿈을 꾼다. 내 연인 J는 내가 이런 꿈을 꾼다고 할 때마다 실소를 터뜨린다. 인터넷에서 '여자친구는 남자친구가 바람피우는 꿈을 꿨다.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괜히 화를 냈다'라는 류의 글을 많이 주워봤는데, 나는 반대다. 맨날 내가 바람이 난다. 그런데 J는 화내지 않는다. 그냥 조금 어이없어한다. 내가 욕구불만이란다. 진짜 웃긴다.


결혼하면 꼭 침대 매트리스는 크고 좋은 것으로 구매해야지. 다른 것에는 다 아껴도 침대만큼은 아끼지 말아야지. 우리나라 침대 매트리스 회사들이 죄다 가족 사이라서 매트리스 하나에 상표만 바꿔달고 가격을 뻥튀기시킨다던데, 흠. 잘 구별하면서도 현명한 소비자가 되어야지. 침대만큼은 정말 꼭 좋은 것으로. 너무 폭신하지 않고 적당히 쿠션감이 있으면서도 단단해서 몸 전신을 아주 작은 천국의 천사들이 잡아 들어주는 것처럼 감싸주면 좋겠다. 공중부양하듯. 내가 지금 매트리스에 누워 있는 건지, 아니면 구름 위에 떠있는 건지 구별이 안 가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뜨니 7시간이 저도 모르게 삭제되는 그런 침대면 좋겠다. 아 쓰다 보니 춥긴 춥네. 어떻게 창문을 열고 잤지.


브런치를 시작한 이후 고민을 많이 했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써야 할까?' 왜냐하면 내 글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시작된 불안. 계속해서 고민했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아, 아니 아니.' 이미 커플 맛집/여행 블로그를 운영하며 그 고민은 매일 한다 - 어떻게 해야 유입을 늘릴 수 있을까, 어떤 트렌드가 방문자를 유입할 수 있을까 - 그러나 브런치만큼은 내 공간이고 싶어. 나를 드러내고 싶어. 내 글을 보여주고 싶어. 그런데 그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쩌지? 어찌 보면 배우의 삶과 똑같네. 내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내 매력은 무엇인지 보여줘야 하는데. 보여주지 않으면 모르는데. 그런데 그들이 날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끊임없는 불안의 고리.


오늘 새벽 잠들기 전 너무 답답해서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서. 내 안에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용량을 초과하기 직전이라 배터리가 과열돼 빵빵해져 버린 것 같았다. 이 이야길 풀어내야 돼. 내 머릿속에서 꺼내야 돼. 125기가 바이트 중 124.6기가 바이트가 차버렸다. 오디션 영상을 찍고 싶다면 결국 추억을 조금 들어내야 하는 내 처지처럼 되지 않으려면 나는 조금씩 기록해야 해. 삭제하지 않고, 남기는 거야 내 흔적을. 어떤 방식으로든 상관없지만 일단 글을 써보자. 그렇다면 이곳은 너의 배설창이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그렇지만 아니야. 이 글 목록은 내 가족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이다. 이것들은 나 자체다.


나는 계획 세우기 중독이다. 연 계획, 월 계획, 주 단위 계획까지 세우다가 지키질 않는다. 다만 그중 몇 가지는 일 년 내내 내 마음속 어디 한 구석에 지니고 있다가 잊을 만하면 존재감을 불쑥불쑥 드러내 결국에는 지키게 된다. 나는 그 나만의 원리를 좋아하게 됐다. 아마도 팬데믹의 어느 지점에 내가 세운 연 계획 중 하나가 바로 '브런치 작가 승인되기' 였으니까. 나는 조금씩 느리더라도 목표를 이루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스스로 터득한 게 아니냐는 한 동료의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그렇구나. 나는 이미 알고 있구나. 목표를 이루는 법을. 엉킨 실타래의 끝지점을 찾은 것 같다. 아주 조심스레, 섬세하게 한 올 조금씩, 조금씩. 그래, 그렇게. 그렇지, 반대로 그렇게, 조금씩. 그렇지! 잘했어! 하나 풀었다. 머릿속에 압축 파일 하나를 설치한 것 같다. 많이 가벼워졌다. 지금 내 머릿속 용량은 갑자기 80기가바이트. 조금 느려도 괜찮으니 하나씩 해보자. 브런치에는 연말까지 모닝페이지를 올릴 거다. 12월 31일까지 D-74. 74일 만에 내가 새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히 알고 있지만, 적어도 부인검진을 마친 사람. 그리고 미루던 카메라를 구입한 사람이 되어있겠지. 그렇다면 10년 뒤엔 난 어떤 배우가,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걱정보단 기대로 아침을 시작하다니. 가벼운 머리로 시작하다니, 행복하잖아. 하나씩 하면 된다는 그 원리를 되새겨본다.


어떤 글을 써야 할지에 관한 부담도 흐려졌다. 그냥 쓰면 되지, 그냥.

그냥 노래 부르면 되지.

그냥 추면 되지.

그냥 말하면 되지.

그냥

그냥


그냥


그냥!!

그냥!!!!


그냥!!!!!!!!



그냥 무작정 떠났던 그날처럼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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