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빛이 회색에서 흰색으로

고민을 떨치기까지 단 30분 모닝페이지

by 엄달님

2025.11.25. 화 8:26


오늘은 이전에 세웠던 루틴처럼 한 번 부지런하게 살아보고자 억지로 알람을 맞춰 일찍 일어났다. 그런데 실수는 바로 모닝페이지를 썼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 하고 관성대로 휴대폰부터 열어본 것이다. 아침부터 나에게 정보들이 쏟아진다.


원로배우 이순재 선생님께서 새벽 별세하셨다. 난 역시 겨울이 싫다. 겨울엔 자꾸만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지금 강릉 처음 가보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이 모닝페이지를 쓰고 있었을 것이다. 친한 동료의 아버지께서 이틀 전 하늘의 별이 되셨다. 어저께는 대구에서 연습을 하는 바람에 강릉까지 이동이 쉽지 않았다. 장례식장 도착 예정 시간이 자정 즈음이었는데, 요즘은 장례식장이 밤에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생각해 보면 하루 종일 피곤하게 조문객 맞이를 했는데 새벽에도 해야 한다면 벅찰 것 같다. 미처 생각하지 못 한 부분이다. 그래서 그냥 다시 집으로 왔다. 같은 날엔 아빠의 고모부께서 돌아가셨다. 벌써 3년 전 11월, 나의 친할머니께서 갑자기 떠나셨다. 나는 친할머니와 각별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얼마 전 친구들과 할머니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친할머니가 안 계시잖아'라고 덤덤히 말하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커튼을 걷었더니 내 예상과는 다른 하늘 풍경이 펼쳐진다. 회색빛이다. 창문엔 물방울이 징그럽게 맺혀있다. 비가 온다. 아 오늘은 비가 내리겠구나.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나는 비 내리는 날씨를 좋아했다. 비를 시원하게 맞는 것도 상쾌하고, 방 안에서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개인이 된 듯 사색하는 것도 즐겼다. 그렇지만 이제는 비 오는 날씨에 그다지 유쾌하지가 않다. J는 우체국 집배원이다. 누군가는 궂은 날씨에 목숨을 걸고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원래도 알고는 있었겠지만 굳이 내 일상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다.


살짝 차분해지는 아침이다. 그런데 글을 쓰는 방금 나태에게 2만 원만 계좌로 쏴 달라는 전화가 와서 다시 들떴다. 아무튼. 다시 내 얘기를 찾아보자면. 아 갑자기 방황. 뭐 아무튼간에 나는 비 오는 날씨가 싫어졌고, 자꾸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겨울이 반갑지가 않다는 거다. 오늘 아침엔 내가 두부찌개를 만들겠다고 엄마에게 선언하고 잤는데, 내가 너무 늦게 일어난다고 판단하셨는지 좀 아까는 칼질 소리가 들리더니 지금은 좋은 음식 냄새가 난다. 엄마가 일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가보지 않고 글을 쓰고 있다. 아침부터 사소한 불효 하나를 적립한다.


어젯밤에는 내가 너무 질투가 많고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 그것에 대해 아침까지 생각한다면 모닝페이지에 이 이야길 쓰고 싶었다. 현재 질투심과 불안 두 가지가 모두 높은 까닭은 자신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배우 일자리 박람회에서 내 프로필이 휴지조각처럼 나부는 걸 봤을 때. 처음 간 리딩공연 연습에서 내 역할이 애매하다고 느꼈을 때. 6개월 이상 열심히 운영한 블로그가 점점 퇴보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때.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열심히 PR을 해 SNS를 키우는 사람들을 볼 때. 나는 꼭 남들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 내가 당연하게 주연일 수도 없고, 몇십만 팔로워를 가진 사람들이 부럽다면 시작해야 하고, 블로그의 문제점이 있다면 고치면 되는데. 나는 지금 질투를 하고 있다,라. 아마도 곧 스물아홉 살이라는 나이에서 오는 불안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스물두 살에 배웠던 기타를 6년 동안 꾸준히 쳤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기타 연주를 하고 있을까? 물론 흥미가 안 붙었지만.


뭐든 늦은 것만 같은 이 불안감은 바람처럼 지나가려나.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그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흐릿하던 하늘 사이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온다. 분명 회색빛이었던 하늘이 이 문장을 쓰는 지금 돌아보니 하얗게 바뀌어 있다. 어리석게도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긍정의 신호라고 믿는 나다. 최근 할머니와 J가 연달아 나에 대한 너무나도 좋은 꿈을 꿨다. 이미 복권은 망했으니까 꿈 얘기를 떠들어도 되겠지. 지금은 살짝 까먹었는데, 우선 할머니는 어린 나를 업고 산책을 나갔는데 어떤 요정이 선물을 줬다나. 그런 꿈이었고, J는 금덩이 세 개를 캤는데 누군가 세 개를 턱 하니 더 주는 꿈을 꿨다. 누가 봐도 로또 1등에 당첨되는 꿈이 아닌가. 모두 나에게 먼저 꿈을 이야기해서 내가 그 꿈 두 가지를 샀는데, 효험이 떨어졌었나.


엄마가 두부찌개를 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요리인데, 흑백요리사 이모카세의 레시피를 참고해 만들었단다. 그런데 잘 안 됐는지 뭐라 뭐라 얘기를 하고 방문을 닫고 나간다. 곧 나가서 한 번 맛을 봐야겠다. 엄마는 병가를 써서 쉬려고 했는데 할머니 때문에 그러지 못하게 됐다. 지금은 복직 기간이지만 있는 휴가 없는 휴가를 다 끌어다 써서 할머니와 하루 종일 지내며 돌보고 있다. 정말 갑자기 내가 아침에 했던 이런저런 고민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진다. 내가 우선 해야 할 일은 할머니 생신 케이크를 예약하는 것과 엄마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이탈리아 미술 여행 계획을 오늘 함께 세우는 것이다. 11시부터 구매할 수 있는 식빵 대기도 하러 가야 한다.


6년 뒤, 서른네 살의 내가 똑같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 미래의 나와 다시금 접속, 연결.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오늘은 영어 공부와 중국어 공부도 해야겠다. 인생에서 꾸준히 미뤄온 것들이다. 6년 뒤에 내 곁에 가족 모두가 지금처럼 있어줄까? 그때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95세다.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때의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오늘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지 말아야지. 오늘은 반드시 하드디스크에 사진파일을 옮겨야겠다. 일단 지금 휴대폰에 있는 파일들부터 옮겨 놔야겠다. 휴대폰이 포화상태다. 그리고 이번 주 반납 예정인 책들을 모조리 읽어야겠다. 한 가지는 경제책, 한 가지는 자기 계발 서적이다. 내가 평소라면 곧 죽어도 읽지 않는 주제의 책들인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내가 이젠 다르게 변해야겠다는 생각에 빌렸다. 소설은 잠깐 끊었다.


9시 1분. 환율이 1,500원을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내가 무얼 해야 할지도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 걱정들을 뒤로하고 6년 뒤의 나와 접속해서 당장 오늘 할 일들을 생각해 보니 내가 남을 질투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6년 뒤의 나는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한 배우가 되어있을까? 틱톡과 유튜브 팔로워 1만 명 이상이 되어있을까? 가정을 이뤘을까? 혹시 부모가 되었을까? 아기 낳을 생각은 아직 없다. 글을 꾸준히 쓰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글과 사진을 좋아해 주고 있을까? 더 구체적으로 오늘 그려봐야겠다.


우선 움직여야 한다. 두부찌개 냄새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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