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던 카메라를 사는 날이다

미루기 싫은 사람의 아침일기

by 엄달님

2025.12.4. 목 8:39


버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쓰는 모닝페이지. 아직 정신이 덜 깼으니까 모닝페이지로서 가치가 있겠지. 지금은 일상 기록 용 카메라를 중고로 구입하기 위해 다산동까지 버스로 이동 중이다. 운전해서 18분 정도면 되는 길을 버스로 구불구불 한 시간을 걸려서 간다. 그냥 멍 때리고 있다가 글이나 써야겠다 생각했다. 휴대폰으로 글을 쓰니 오타가 많아져 자꾸만 지웠다가 다시 쓴다. 모닝페이지 취지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본다.


어저껜 자꾸만 미루다가 좌절하게 되는 순간에 관해 돌아봤다. 정확히는 그 순간보다도 미루는 나 자신에 대해였다. 물론 예산을 터무니없게 낮게 잡은 탓이겠지만, 경기도에서 지원해 준다는 유방암 검진을 받으려고 나온 날 이미 전날 예산 소진으로 지원사업이 마감되었다는 걸 알았을 땐 많이 절망했다. 사업이 시작된 지 한 달 정도밖에 안 됐을 무렵이었다. 당시의 나는 이 검사를 받지 못해서 유방암에 걸린 것을 아주 나중에 알아버린다면 어쩌지 불안해하기도 했다. 연말까지 하는 사업에 얼마나 예산을 적게 산정했길래 이렇게 금방 다 써버리는지 원망도 했다.


J와 함께 있으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다 보니 어젠 너무 추워서 집 가는 길에 택시를 타야겠다 마음먹었다. 밤 열 시부턴 서울택시에 할증이 붙으니 꼭 아홉 시 반에 택시를 타리라. 그러나 미루고 미루다 나는 결국 30%도 아닌 40% 할증이 붙는 밤 열한 시 가까이에 택시를 타놓고선 왜 미루기만 했을까, 그래서 왜 돈을 낭비하게 됐을까 원망만 한 것이다. 결국 중간에 지하철역에 내려 가까스로 집으로 향하는 노선의 지하철의 시간을 맞추어 탔다. 미루지 말아야겠다, 미루다가 손해를 본다. 그렇다고 누가 나한테 그러니 미루지 말고 좀 부지런히 살라 충고하면 고까운 것이 내 못된 마음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버스 위에 있다. 더 좋은 가격이 나오면, 더 좋은 구성이 나오면 하고 미뤘다간 올해가 가기 전에 카메라를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어도비 편집 프로그램을 친구와 함께 결제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사실 이미 많이 미룬 상태인 거다. 55만 원. 만 원 이만 원도 무지 아까워하는 내가 이렇게 무언가에 돈을 과감하게 쓰는 것이 무척 오랜만이다. 그래서 더 미뤘던 것 같다. 때론 나를 위한 용감한 투자가 필요한 법이니까. (중고로 사면서 말이 많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기사님께서 화장실에 가신다고 잠깐 버스를 멈춰 세웠다. 종종 ‘버스 기사님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땐 어떻게 할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잊고 있던 궁금증이 하나 풀렸다. 아마 기사님들마다 정해놓은 화장실 지점이 하나씩 있는가 보다. 고속버스 기사님들은 그럼 승객과 마찬가지로 휴게소에서 일을 해결하시겠군. 그런데 가끔은 휴게소에 닿기 전에 방광이 터져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 있는데 그들에게도 운전 중 그런 위기가 오지 않았을까? 괜한 궁금증들이 스친다.


아주 오랜만에 나를 위한 물건을 사러 가는데 왠지 설레지가 않고 조금 두렵다. 꾸준히 사용할 수 있을까? 미루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은 전에 은빛 양과 깊은 대화를 나눴던 것을 토대로 내가 어떤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계획해봐야겠다. 그리고 오늘 당장 하나 찍을 거다. 이 카메라를 사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우선 첫 번째, 너무 오랫동안 할머니와 우리 가족들에게 벌어지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기록을 미뤘다. 두 번째, 나 스스로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오랜 시간 놓쳤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것은 아니고 재미있게 꾸준히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날이 춥다. 어제부터 영하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겨울이 되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인간의 몸에 복잡하게 뻗은 혈관들이 수축하는 것이다. 그러다 막히고, 끊기는 현상이다. 갑자기 찾아오는 이별이다. 미처 나누지 못 한 인사다. 정리하지 못 한 내 마음이다. 떠나보내는 것이다. 나열하고 보니 걱정이 많은 게 걱정이다.


그래도 겨울이니까 무늬가 알록달록 예쁜 스웨터를 입고 싶어진다. 멋 부린 것 같으면서도 시크한 겉옷을 하나 사고 싶어진다. 창밖을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동네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꾸리고 살고 있구나.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이 모든 게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상상해 보는 버스 안에서 멀미 나는 아침이다. 오늘만큼은 좋은 게 좋은 거지, 좋게 좋게 생각하자는 내가 되고 싶다. 돈은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거지. 지금은 내가 벌지 못하고 쓰고만 있는 실정이지만서도 언젠가 아쉬움 없이 살겠지. 조금 우울하다가도 금방 행복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이지.


어느새 거의 다 왔다. 버스에서 내렸다. 입김이 난다. 땡큐 58-3이라는 특이한 번호의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오늘은 주식창을 들여다보지 않겠다. 배고프다.


끝.


버스 모양이 더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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