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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돈 1억에 오늘을 샀다.

유학, 재정적 현실과 그에 따른 생각

by 엄지

3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1억 5천만 원을 벌었다. 그중 1억을 들고 호주에 왔다. 학비 7천만 원을 빼면 3천만 원이 남고, 천만 원으로 중고차를 구입했으니 2천만 원이 남았다. 동생 집에서 함께 살게 되면서, 동생에게 달에 50만 원씩 주기로 했다. 학업 기간 2년 동안 총 1,200만 원을 주게 되는 셈이니 이제 800만 원이 남는다. 유류비는 아껴 쓰면 한 달에 20만 원 정도, 2년이면 약 500만 원이다. 300만 원이 남았다. 2년으로 나누면 한 달에 12만 5천 원.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모으는 여행 통장으로 한 달에 5만 원씩 빠져나가니, 한 달에 쓸 수 있는 금액은 7만 5천 원. 하루빨리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한다.


큰일이다.


통장 잔고 걱정을 꽤 오랜만에 하고 있다.


취업 후의 나는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을 까마득히 잊고, 한동안 돈을 '펑펑' 쓰며 살았다. 비싼 옷, 피부과 시술, 네일아트, 고가의 운동 강습에 거리낌 없이 소비했다. 그럴수록 그 '소비'의 크기가 '성공'의 크기처럼 느껴졌다. 늘어나는 월급보다 소비는 더 빠르게 늘었고, 더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커졌다. 열심히 돈을 벌고 있었지만 어쩐지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남들을 따라 주식을 공부하고, 경매를 공부하고, 마케팅을 공부하고, 부동산을 공부했다.

돈을 벌면 '일희', 잃으면 '일비' 하며 살았다.


돈이 내 삶을 위한 것이어야 했는데, 어느새 삶이 돈을 위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월 천만 원 벌기”

“자동적 현금 흐름 만들기”

“주식 대박, 부동산 대박, 코인 대박”


언론에서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도, 핸드폰 속 광고에서도 모두가 '부자'가 되라고 한다. 경제적 자유가 곧 인생의 자유이고, 부자가 되는 것이 어쩌면 유일한 성공이라고, 모두가 외치고 있다. '얼마를 벌었는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대변하는 이 사회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시드머니를 모아 부동산을 사고, 주식을 사고, 코인을 사서 부자가 되고 있다. 그들은 미래를 위해 치밀하게 계산하고, 효율적으로 돈을 굴린다. 성공을 위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을 고민한다. 높은 연봉과 높은 수익률로 그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


하지만 나는 별나게도, 그 '씨앗'을 다른 곳에 심었다.

'돈'이 아니라 '삶'을 먼저 중심에 두고자 하는 불확실한 길을 택했다. 스스로에게 '미래'가 아닌 '지금'을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정직하게 답하기로 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성공 루트' 대신, 한적한 '나만의 길'을 걸으며 살기로 했다. 그 끝은 '돈을 좇는 삶'이 아니라,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충분히 돈이 따라오는 삶'으로 정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만약 오늘의 도전을 포기한 채 10년이 흘렀어,

그때의 네가 1억을 주고 지금 이 도전을 살 수 있다면,

기꺼이 살 거야?"


그 물음에 미래의 나는, 단 돈 1억에 오늘을 샀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면, 그건 돈이 부족하기 때문이다'라는 농담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것을 사야 행복할 수 있는지'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남'이 정해놓은 성공의 기준을 따라가면서, '진짜 내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타인의 잣대로 측정된 행복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절대로 닿지 못한다.

나는 이 1억으로 비싼 자동차를 샀다면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호주에서의 매일매일 느끼는 감정들과 배움들은 지불한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충만함을 준다.


그 값이 단 돈 1억이었다.


나는 돈이라는 것이 '노동의 가치' 따위로 점철되는 단순한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다. 그것을 더 이상 ‘노동의 그림자’로만 두고 싶지 않다. 같은 1억이라도 내가 어떤 사회 안에서, 어떤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것의 가치는 달라진다고 믿는다. 돈을 쓰고 버는 방식이 삶의 모습과 가치관을 반영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돈은, 삶의 편린들을 연결하는 고차원적 매개이다. 이 관점을 의식하니, '얼마나 버느냐' 보다 '어떤 태도로 다루느냐'가 훨씬 중요해졌다.


돈이 아닌 삶이 중심이 될 때, 역설적이게도 삶은 더 풍요롭게 흐른다고 믿는다. 경험은 통찰을 낳고, 통찰은 예상치 못한 기회로 이어지지 않을까. 오늘의 '경험 자본'이 어쩌면 미래에 더 큰 가치로—꼭 경제적인 것만이 아닌— 돌아오지 않을까. 주식이 오를지 말지 보다는 나의 미래를 가늠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쉽다.


여전히 경제적 자유는 나에게도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 자유의 순서를 바꾸어보기로 했다. '나의 성장'을 '돈'이 따라오게 만들기로 했다. 당신은 자유가 돈을 낳도록 살고 싶은가? 아니면 돈이 자유를 사주기를 기다리며 살고 싶은가? 나는 아무래도 전자로 살아야겠다.


이 과정에서 모두가 옳고 나는 틀린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드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안들은 대개 내 것이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낸 환영 같은 것에 불과함을 안다. 한 시대가 정답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다음 시대에는 틀린 답이 될지도 모른다.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정답’들이 지금에 와서 '오답'이 되었는가?


그러니 지금 남들이 말하는 정답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의 불안도 시대의 유행을 탄다.

서른이 되니 이 정도쯤을 알게 되었다.


진짜 부는 '스스로 선택한 방향'으로 '끝까지 걸어갈 용기'에서 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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