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후회하냐 묻는 당신에게
“후회 안 해?”
그 좋다는 공기업을 그만둔 후 자주 듣는 질문이다. 말투에는 걱정이 묻어있고, 표정에는 기대가 실려있다. 그런데 그 문장 안에는 이미 그들이 원하는 대답이 있다. 나는 이 질문에 웃음으로 대답하는 법을 벌써 터득해 버렸다. 따라 해 보자. 입꼬리는 활짝 올리고, 미간은 찌푸리고, 어깨를 한 번 들썩인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그리고는 조용히 돌아서서 이 글을 쓴다.
타인의 후회를 묻는 당신의 질문이, 질문이 아님을 안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벗어난 그 ‘회사’가 –과거의 나처럼- 간절히 바라는 공간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애써 버텨내는 –혹은 버텨냈던- 현실일 수도 있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그 ‘왜곡된 렌즈’에 투영된 나의 삶은 이미 그 프레임 속에서 결론이 나버렸다.
내가 후회하든 말든,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불편해하거나 안도한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침묵마저 ‘그들이 원하던 대답’이 된다. 안도하는 그 모습이 나로서도 차라리 보기는 편하다.
이제 대답을 해보겠다.
그래서 후회하느냐고?
퇴사를 결심하던 밤에도 나는 흔들렸다. 사직원 공문 결재를 올리던 순간에도 망설였다. 사무실 자리를 비워내는 날도 이게 맞나 싶었다. 확신을 말하던 수많은 밤들은 어느 새벽 하나에 와르르 무너졌다. 나 자신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 괜찮을 거라던 낙관도 누군가의 발길질 한 번에 픽 쓰러졌다. 그러면 나는 그 연약한 모래성을 다시 눈물로 굳혀 올렸다.
이게 후회인가? 그렇다면 나는 자주 후회했다.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도 종종 후회할 것 같다. 그런데 괜찮다. 왜냐하면 우리 삶은 하나의 감정에 의해 점철될 만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감정을 삶이 틀렸다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우리는 너무 완벽한 길을 찾으려고 애쓴다. 늘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갇힌다. 하나뿐인 인생이라 실수하면 안 되고, 손해 보면 안 되고, 실패하면 안 될 것만 같다. 그런데 살만큼 살아본 당신도 알잖나. 주어진 가능태를 모두 살아볼 수 없는 우리에게 후회 없는 삶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묻는다.
"당신은 무언가를 후회하는가?"
후회라는 말엔 늘 ‘실패’의 어감이 담겨있다. 사람들은 마치 실패라는 죄를 자백받으려는 듯 후회를 묻는다. 하지만 다시 말하자. 당신의 후회는 실패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거가 아름다웠다는 증거이다. 그 과거도 물론 당신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후회’라는 이름으로 알 수 없는 미래를 아름다운 과거와 비교하려 든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림 한켠에 코를 박고 작품의 잘잘못을 따질 수는 없지 않은가?
삶은 ‘선택’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택 그 이후의 태도가 만들어간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선택지 중, 어떤 길에 후회가 있을지 당신은 모른다. 설령 당신이, 아주 대단해서, 누군가의 후회를 확신한다고 해도, 그 후회의 시간을 살아내는 그의 태도까지 결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현재를 그리며 미래를 상상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인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러니 오늘 그린 획 하나를 후회하기보다 전체를 느긋하게 조망하며 살아보기로 하자. 여유로운 태도로 삶을 끝까지 그려보도록 하자.
삶이라는 그림은 '태도'라는 붓으로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 ‘태도’를 돌보는 사회에 살고 싶다.
그러니 벚꽃을 떨어뜨리는 나무에게 후회하냐고 묻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