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할 때 듣게 되는 덕담과 악담들
"엄지, 퇴사한다며!" 하고 묻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렇게 됐어요" 하고 대답하면 누구는 놀라고, 누구는 걱정하고, 누구는 응원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인생에서 괜찮은 문장 하나를 길어 올린다. 그들의 삶을 꼭 빼닮은 문장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나의 퇴사를 묻고는, 그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답했다.
흥미로웠던 건, 회사 바깥의 사람들과 회사 내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다는 점이다. 회사 바깥에서는 대부분 나를 응원했는데, 출근해서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를 걱정하거나 안타까워했다. 퇴사율이 아주 낮은 회사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직이 아닌 '학업'이 이유였으니 나는 더욱 생소한 케이스였다.
이 생소한 사건(?)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달랐다. '부럽다'. '멋지다'라는 말을 쉽게 내어주는 사람도 있었고, 나의 선택을 '별난 결정'과 '철없는 행동' 사이 어디쯤으로 보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의 퇴사가 누군가에게는 잊었던 꿈을 떠올리게 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에게는 조직을 떠나는 것이 곧 삶의 기반을 잃는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의 조언과 걱정은 나를 향한 말처럼 보였지만, 그들 자신의 불안과 기대, 또 후회의 말들이 섞여있었다. 그러니까 그 말들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들 자신을 말하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들었던 대부분의 문장들은 귀에 닿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졌다. 문장들은 거의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에 내 안에 머무를 수 없었다. 가끔 어떤 문장들은 까딱하면 나를 자만하게 만들거나 처연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런 말들 사이에서 중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내 선택의 이유를 나의 언어로 분명히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퇴사를 할 때, 회사에서 들은 문장들을 기록해 보기로 했다. 나에게 닿지 못하고 스러진 말들이 지금 이 글을 위한 거름이 되었다.
표현은 칭찬 같았지만,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내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전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사실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그들보다 덜 두려웠을 뿐이다. 우리 각자는 두려워하는 것이 다 다르다.
나는 두려워도 참고 해낸 것이 아니라, 덜 두려웠기 때문에 해보기로 한 것이다. 20대를 다 바쳐 이룬 것들을 포기한다고 생각하면 두렵기야 했지만, 남은 삶을 생각하다 보면 내가 여기서 안주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평범하고 편안한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삶이 한 번 뿐이라는 사실 앞에서는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문장은 나의 용기를 말하는 듯하지만, 그들 스스로의 두려움을 고백하는 말처럼 들릴 뿐이었다.
나에게 유학에 대한 가벼운 조언을 해 준 적이 있던 한 분이 내 퇴사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미안한 마음'이라는 단어 안에는 당신의 잠정적 결론이 묻어있었다. 퇴사는 좋은 선택이 아닌데, 자신이 괜한 영향을 주었다는 뉘앙스였다. 과거의 몇 마디 조언들이 한 사람의 인생에 격변을 야기했으리라 생각하시는 걸까. 당신 안에서조차 성글어있는 그 조언은 그 누구의 세상에도 엉겨 붙지 못한다. 그런 말들은 나의 삶을 쥐고 흔들 수 없다.
나는 오래된 나름의 고민 끝에 내 길을 선택했을 뿐이고, 당신의 말은 내 결정의 일부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미안해 마세요" 하고 답했다.
이 말은 어쩌면 당신의 커리어에 대한 자부심이었을지 모르겠다. 혹은 '회사'라는 공간이 당신에게 정말 많은 걸 선물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배움을 내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배움은 어디에나 있다. 그 배움이라는 것이 꼭 이 조직 안에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수직적인 기술이나 성과보다는, 시야를 넓혀가는 배움이 더 좋다.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선택한 방향도 꽤 배울 것이 많아 보인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차별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따른 벽이 분명히 있다. 각자의 벽에 갇힌 우리들은 그 안에서 종종 상처를 받는다. 그런데 그 아픔들을 피하기 위해 가고 싶은 길을 포기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스스로를 향한 차별일지 모른다.
나도 안다. 세상은 결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저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를 선택하면 될 일이다. 그 불완전함 속에서 나는 포용력을 갖게 될 것이다. 상처받고, 부딪히고, 차별을 느끼는 그 모든 경험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나이로 선택을 규정하는 건 낡은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여전히 누군가는 이 방식을 고수한다. 그런데 사실 그 말들 속에는 그들의 체념이 담겨있다. 나이 탓을 하는 건 아마도 이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익숙하게 건넸던 핑계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이 때문에' 뭐든 새로 시작하기 어려워하는 당신의 모습을 나에게 투영해 버린 것이 아닐까.
난 아직 스스로 그런 핑계가 필요하지 않은 걸 보니, 퇴사하기 아주 적당한 나이인 것 같다.
현실적인 조언처럼 들릴 뻔했지만, '현실'이라는 틀에 자신을 가두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에겐 이 틀이 더 안전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겐 오히려 그 안에서 갇히는 감각이 더 선명했다.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면, 애초에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나에게 중요한 질문은 '돌아갈 수 있는가'가 아니라 '돌아올 수 없어도 괜찮을 수 있는가'였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은 아직 없다. 누군가는 익숙한 틀 속에서 안정을 찾지만, 나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내는 편이 더 좋다. 그 차이뿐이다.
이 말은 유난히 조심스럽게 들렸다. '절대'라는 말속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말에 선뜻 기대고 싶지 않았다. '절대'라는 말은 '확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종종 '두려움'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단어는 이상(理想) 일 뿐임을 당신도 아시면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이 문장은 아직도 결론 없이 머무른다.
사실 나는 후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의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이 삶이라고 믿고 싶다. 그래서 이 문장의 판단은 미래의 나에게 유보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런 판단도 없이 그저 내 결정을 따뜻하게 바라봐준 사람들도 있었다.
회사에서 들은 조언 중에 가장 간직하고 싶은 문장이다. '실패'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문장이었다. 이 말을 건네준 당신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음이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닥칠 때면, 나는 아마 이 문장을 다시 더듬어 볼 것 같다. 판단이 걸러진 믿음의 말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정말 퇴사를 했다. 송별회에서 내 이름으로 삼행시를 지어주시며 나를 울게 만든 과장님, 나의 퇴사를 진심으로 아쉬워하던 동료들, 이별이 아쉽다며 먼저 울어버린 귀여운 동료, 퇴사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와 준 나의 사랑하는 동기들, 또 다 두고 떠나려는 마당에 선물은 어찌나 많이 받았는지. 그들의 마음 덕분에 혼자 떠나는 길목이 덜 쓸쓸하다.
퇴사를 하고 보니, 이 회사는 나의 '20대'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이 서사에 담긴 모든 사람들을 정중히 보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덕담과 악담에도 말을 아끼고, 그저 활짝 웃어 보였다. 이해와 오해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던 이 시절을, 그저 단순하고 아름답게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래서 '고마움' 하나만 어깨에 메고, 나는 잘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