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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저 졸렸을 뿐인데 세상이 바뀌고 말았다.

상상이 현실이 되어 가는 과정에 대하여

by 엄지 Ma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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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꿈을 꾼다. 무심코 스치는 작은 바람부터, 인생을 바꾸고자 하는 큰 열망까지. 마음속에 자리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이 상상을 내 세계 밖에 꺼내놓고 행동을 더하면 어떤 복잡 미묘한 과정이 시작된다.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 중에서, 결국 현실이 되는 상상은 조금씩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그 상상을 더 선명하게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작은 우연이 반복된다. 관련된 것들이 꿈속에 점점 더 자주 나타난다. 그것은 때로 아주 복잡한 양상이기도 하고, 때로는 단순하고 알기 쉬운 모양이기도 하다. 또 자의든 타의든, 아니면 이 둘이 합쳐진 SNS 알고리즘이든, 원하는 것과 관련된 정보들을 인식할 기회가 많아진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있었는지도 모르는 것이, 내가 불러주니 어느새 내게 와 '꽃'이 된다는 김춘수의 ‘꽃’에 나오는 구절이 딱 적확한 비유이다.


누구나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텐데, 그때의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제부터는 한국에서 공기업을 때려치우고 다른 삶을 선택한 나의 이야기다.


오후 어느 즈음, 졸음이 밀려오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있으니 잠깐 잠을 깨려 딴짓을 하고 싶었다. 한 달 정도 훌쩍 여행이나 가고 싶다는 생각에 무심코 휴직 규정을 읽었다.


제50조(휴직사유)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휴직을 명할 수 있다.
   …
   14. 국외 유학을 하게 된 때
   …


나는 이것을 그저 따분한 마음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읽었고, 아주 잠깐 막연하게 '유학 생활'에 대한 상상을 했다. 문득 궁금한 마음에 이 조항을 근거로 해서 국외 유학을 간 직원들이 있는지 검색했다. 폭풍 서치를 해서 우선 3명을 찾았다. 사번을 보니 다 나처럼 저연차인 것 같았다. '사우 찾기'로 이름을 검색했다. 없었다. 국외 유학으로 떠난 세 명의 사람들은 '모두' 이 회사를 떠나 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 미래에는 또 다른 삶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변화'를 상상해 본 사람들에게는 이런 순간이 꼭 존재한다. 삶의 막연한 불만족감, 그것에 적응될 무렵 문득 떠오르는 '변화'에 대한 상상. 이름도 형태도 없는 막연한 그 상상은 대체로 마음에서 크게 요동치지 못한 채 흘러간다. 그런데 그 작은 상상이 우리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나의 경우, 모니터 앞에서 잠을 깨보고자 꿈뻑꿈뻑 읽었던 휴직 규정 때문이었다.


몇 달 후, 동생이 살고 있는 호주에 놀러 갔다. 늘 그렇듯 시시콜콜한 서로의 목표를 이야기했다. 동생은 '나만의 공간이 절실하다'라고 하며 빨리 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농담을 했다.


“주현아, 너 호주에서 집 사놓으면 언니도 호주 가서 너랑 같이 살게.”


동생은 몇 달 후에 정말로 집을 샀다.

(동생이 집을 사게 된 과정도 모든 필연의 우연한 결과였다.)


“언니 나 집 샀어, 진짜 호주 올 거지?”


마음이 이상했다.

그냥 가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내친김에 호주 석사 유학 과정을 찾아나 보기로 했다.


호주에서 석사 졸업 후 현지 취업을 위해 신청하는 '졸업생 비자'라는 것이 있다. 업무 경험을 토대로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호주에서는 꼭 필요한 비자였다. 호주 정부는 이 비자를 위한 나이 제한을 '만 50세'에서 '만 35세'로 대폭 낮춘다고 했다. 나는 당시 '만 29살'이었다. 대학원 지원 및 영어 성적을 위해 1년 이상 소요된다면, 나는 적어도 '만 30살'에 입학하게 된다. 석사과정은 커리큘럼에 따라 넉넉히 3년이 소요되니, 그때 나의 나이는 '만 33살'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풀렸을 때의 가정이었다. 몇 년 더 고민하다 보면 촉박한 현실에 두려움만 커질 것 같았다. 원래부터 냅다 추진하는 성격 덕분일까, 우선 지원만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냥 지원만 해보는 거야. 결정은 나중에 하자.’


그렇게 덜컥 두 군데에 합격했다.

랭킹이 높아서 가능할까 싶었던 대학교와, 원하던 에너지 관련 학과에서 오퍼레터가 왔다.

하지만 합격을 시켜주면 뭐 하나. 나는 돈도 없고 영어도 못했다. 재정적 한계에 부딪혔고, 영어 점수도 도통 오르지가 않았다. 자격 미달이었다. 원하던 학교의 영어 점수 기준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영어 성적을 맞추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1년에 5천만 원이 훌쩍 넘는 학비와 생활비도 부담스러웠다.


와중에 회사는 너무 바빴다. 가장 바쁜 주에는 실 근무만 90시간이 넘었다. 받을 수 있는 초과근무 수당을 다 받아도 더 일해야 했다. 그 와중에 눈치를 봐가며 연휴 앞 뒤로 휴가를 써서 영어를 공부하고 시험을 보러 다녔는데, 영어 점수는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추진하는 이 과정 자체가 오히려 나로 하여금 '새로운 삶'에 확신을 더하게 만들었다. 점점 더 생생하게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세상은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나를 세상이 도와주기 시작했다.


나이로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생의 지인으로부터 어학연수를 함께 하는 조건으로 대학원 입학을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 조건에도 영어점수가 필요했는데, 나의 영어점수는 단 1점의 오차도 없이 딱 그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3개월에 600만 원이란다. 역시 돈이 없었지만 일단 지원을 했다. 정 안되면 대출 조금 받지 뭐. 그런데 새로 받은 오퍼레터에 이런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당신은 우리 대학이 원하는 수준을 상회했습니다.
어학연수는 20만 원만 내세요.
그리고 석사과정도 연 20%의 장학금을 줄게요.


이게 진짜야? 갑자기 왜?


번역기를 돌려봤다. 내 해석이 맞았다. 어학연수는 거의 '공짜'가 되었다. 그렇게 '갑자기' 예상 학비가 2천만 원 가까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초과 근무 덕분에 퇴직금도 크게 증가했다. 우리 회사는 최근 3개월 임금을 평균으로 퇴직금을 산정하는데, 그 기간 동안 내가 너무 바빠서 초과근무를 많이 한 탓이었다. 학비와 생활비가 내가 생각했던 예산에 딱 들어맞게 되었다.


마음이 바뀌자 세상이 저절로 내게 맞춰 바뀌는 느낌이었다. 세상이 갑자기 내게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저 상상했던 순간에 작은 행동이 더해지니 하나둘 현실이 되어갔다. 필요한 정보와 사람들이 적시에 나타났고, 예상치 못했던 기회가 열렸다.


비약적인 비유일 수도 있지만, 그때의 세상은 나의 상상을 따라 정렬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힘든 것은 없었냐고? 있었다. '기다림'이었다. 준비가 1년이 넘어가니 갈수록 포기하고 싶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데, 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싶었다. 지원하고 영어점수 제출하고 비자 신청하면 출국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과정이 너무 복잡했다. 단계단계마다 서류를 받고 문의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도 너무 길었다. 메일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확인하면서 마음을 졸였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침대 위에서는 끝없는 생각들로 뒤척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선택이 정말 옳은 걸까 하는 의심이 거세게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에게 말했다.

"엄지야. 이미 시작한 거야. 결과가 어떻든 이 과정 자체가 의미 있어."


이 시기에 중요한 것은 '믿음을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속마음을 더 선명하게 간직하는 것, 그리고 매일의 작은 행동들로 그 믿음을 스스로 다시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모든 감정들을 들려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나는 유학 준비 과정 중의 마음의 변화를 기록하기로 했다.(그 기록을 다듬은 것이 지금의 이 브런치 글이다.) 기록을 하며 원하는 것을 이룬 나의 주변사람들을 종종 떠올렸다. 내 주변 사람들도 원하는 삶을 '잘 상상하고, 잘 이루어 가고 있었다.' 작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한 친구의 상상은 '억'소리 나는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으로 현실이 되었고, 주류판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미국 유학 준비를 하던 또 다른 친구는 미국에서 온갖 공모전을 휩쓸더니 얼마 전에는 'meta'의 직원이 되었다. 이뿐인가, 다채로운 삶을 살고 싶다던 초등학교 선생님인 나의 친구 한 명은 지금 'AI를 주제로 강연을 다니는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상상'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확신하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일단 마음에 선명하게 그리고 행동하면 결국 현실이 된다는 것. 우리의 인생과 이 세상은 '시공간을 막론하고' 유기적으로 얽히고설켜있다는 것.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말은 굳이 믿을 필요도 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어떻게'라는 질문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무엇을'과 '왜'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왜 원하는지. 이 두 질문만 선명해지면, '어떻게'는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있는 걸까.


어느새 달력의 연도가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학생비자를 신청하고, 생체등록과 신체검사를 마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상상하던 현실은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유학 휴직 규정을 읽는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때 생겨난 아주 막연한 상상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에 작은 행동을 더해가니 그 상상은 현실이 되어갔다. 방식과 시기는 처음과 달랐지만, 그 본질은 그저 오늘에 존재하고 있었다. 상상하고 느낀 대로 행동하고 살다 보니 오늘의 각도는 아주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저기 먼 미래는, 바뀐 각도에 거리가 실렸는지 아주 많이 바뀌어있는 듯 보였다.


이렇게 '퇴사와 유학'이라는 정말 '말도 안 되었던' 막연한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또 새로운 상상이 자라고 있다.

이제 나는 조금 더 가치 있는 상상을 하기로 했다.

앞으로 상상하는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의 모든 우연과 필연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들마저도 감사하기로 했다.


상상은 계속되고, 현실은 그것을 뒤따른다.

이 반복만이 나의 삶을 빚어내고 있었다.


당신이 했던 상상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상상은 어떻게 현실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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