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의 인생은 사실 뻔합니다.

'감정'이라는 보편의 언어에 대하여

by 엄지

걸음을 망설이지 않으니 관성이 붙는다. 도미노를 정교하게 배열하는 것과 첫 번째 도미노를 쓰러뜨리는 것은 나의 선택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의지와 무관해진다. 이제 퇴사도 유학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이루어지게 될 필연이 되고 말았다. 그간 정교하게도 쌓아둔 탓에 나의 도미노는 속절도 없이 쓰러지는 중이다.


호주 정부에서 주는 입학 확인서인 'CoE'가 나왔다. 이제 비자를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낯선 이의 단순한 행정업무에 내 인생이 달려있는 듯한 무력한 느낌은 늘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기꺼이 판단받고 평가받는 '객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이제 '평가받는 것'이 예전처럼 두렵지는 않다. 왜냐면 주체적인 삶을 살아보기로 한 순간, 나의 삶을 결정짓던 평가는 '삶의 도구'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외부의 판단과 평가는 삶을 짓는 데 잘 써먹으면 될 일이었다.


오랜만에 날씨 좋고 약속 없는 주말이다. 평소 같았으면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 같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퇴사를 앞두니 집에만 가만히 있는 주말도 전혀 아쉽지가 않다. '뭔가를 해야 한다' 하는 마음 없이 주말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내렸고, 노트북을 열어 동생의 블로그에 올라온 새 글을 읽기로 했다.


나에게는 호주에 사는 여동생 한 명이 있다. 한국을 떠나 살겠다는 그 어려운 결정을 한 날, 동생은 이제 겨우 스무 살을 살고 있었다. 동생은 성인이 되자마자 악착같은 아르바이트로 천만 원을 모으더니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그 이후 동생은 아일랜드에서 잠깐 살았고, 미국에서도 잠깐 살았는데, 지금은 호주에서 영주권을 얻어 간호사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동생은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종종 블로그에 적곤 한다. 자신과 비슷한 목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응원이 될 것 같다나 뭐라나.



특유의 재치 있는 글솜씨는 꼭 내 취향이라서, 나는 동생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제 내가 타향살이를 하려는 입장이 되니, 동생의 다사다난한 이민 과정과 그에 따른 감정의 변화가 예전처럼 마냥 재밌게만 읽히지가 않았다.


미처 문장으로 담지 못한 행간의 감정도 (나는 언니니까)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 어느 문장에도 담아놓지 못한 감정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겨두고 있는 걸까.


인종차별, 직장 내 괴롭힘, 재정적 문제, 희롱, 그리움, 우울감, 인간관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그저 나열해 버리기엔 그 단어에 담긴 감정의 농도가 너무 짙었다.


만 나이로 아직도 스물여섯밖에 안된 동생은 지나온 자신의 20대를 온통 부정적인 감정으로 쓰고 있었다. 지금은 행복하다 하는 걸 보니 그때의 악착과 서러움은 지금에서야 조금 괜찮아진 듯 보였다.


그런데 동생의 삶에 쓰인 다양한 감정들은 나의 20대와도 (물리적, 시간적 거리가 무색할 만큼) 많이 닮아있었다. 인종차별과 같은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시련들마저도 대한민국 맞춤 시련이 되어 내 삶에 들어와 똑같은 감정을 야기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우리의 삶이 어떤 보편적인 큰 틀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이 관점이라면 당신의 삶에 들어있는 감정들 역시, 나의 것과 어느 정도 닮아있지는 않을까? 나는 어느새 동생의 글을 읽으며 ‘인생’의 어떤 보편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00만 원짜리 메뉴와 1만 원짜리 메뉴는 모양과 맛은 다를 수는 있겠지만, 허기를 채우는 순간의 기쁨이 같았다면 그것은 똑같은 순간이라고 해도 될 것 아닌가 하는 식의 생각이었다. 또는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나의 몸을 누이는 장소가 우리 집 안 방 침대이든 남극의 이글루 안이든, 같은 정도의 아늑함을 느꼈다면 그것 역시 똑같은 순간이라 여겨도 될 것 같다.


우리는 각자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서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지만, 그 이야기를 '감정'이라는 언어로 번역하면 우리 모두의 삶은 비슷한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감정'은 어느 누구에게나 같은 느낌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든, 우리의 삶이 결국 보편적인 감정으로만 경험될 뿐이라면, 삶은 즐거운 감정을 많이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세상에 부담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젊은 날에 내린 결정 하나가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것만 같던 숨 막히던 느낌은, 삶의 속성이 그저 감정뿐이라는 깨달음 앞에서 무력해지고 있었다.


나의 미래가 세상의 언어로 쓰인다면 어떤 내용일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감정의 언어로 치환을 하면 결국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며 살다 간 인간의 모습'이지 않을까.


삶이 이런저런 감정을 느껴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세상이 달콤하게 지껄이던 그 언어 말고, '감정'이라는 우리 보편의 언어를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는 삶도, 저렇게 사는 삶도, 똑같이 종종 행복하고 가끔 불행하게 되어있다면, 그저 긍정적 감정의 역치를 낮추며 사는 것이 잘 살아가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당신과 나는 삶에 대한 집착이나 불안을 내려놓아도 된다.


이렇게 감정으로 점철되는 삶의 공통성을 인식할 때, 우리 각자의 개별적 삶을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우리의 삶에 정답이 없는 이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모두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제보다 한 번 더 웃으면 그만인 것을 ‘삶‘이라 하기로 했다. 삶은 이렇게도 뻔했다.


[동생의 블로그]

https://m.blog.naver.com/juhyun9533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