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대여료는 하루에 20만 원입니다.
회사에도 통보했고 부모님도 설득했는데, 아직 호주라는 나라를 설득하지 못했다. 내가 왜 너희 나라에서 공부해야 하는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비자를 준다.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 중 하나는 입학확정서(CoE)이다. 학비의 일부를 내고 비싼 보험을 들어야 입학을 확정시켜 준다기에 디파짓과 학생 보험 비용을 송금했다. CoE를 기다리는 중이다. 통장에서 큰돈이 '홀랑' 하고 사라졌는데, ‘너 정말 갈 수 있어’하고 보장해 주는 비자도 아직 없고, 무엇보다 아직 회사에 앉아있으니 현실감이 나지 않는다. 퇴사 일정은 정해두어서 비자가 늦어지면 큰일이다. (비자가 안 나올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 퇴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자라도 나오면 퇴사가 실감 나려나.
<호주 학생비자 신청을 위해 필요한 서류 목록>
기본증명서, 영문주민등록등본, 최근 10년간의 출입국 증명, 가족관계증명서(대법원 사이트 영문 발급 가능), 영문 병적 기록 증명서(군필자해당), 잔고 증명서 또는 소득금액 증명원(부모, 배우자 잔고 대체 가능), GTE Statement 작성, CoE(입학확정서)
‘퇴사’
이 단어만 보면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날 지경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에는 다양한 의미가 함축될 수 있다는데, ‘퇴사’라는 단어 속에는 겪어내야 하는 감정이 많아도 아-주 많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불안, 설렘, 두려움, 기대감, 해방감 등이다. 이 감정을 다 겪어내야 비로소 퇴사할 용기를 준다는데…. 자, 또 어떤 감정이 남았나. 이번에는 '상실감'이란다.
지난 1년간 새로운 모양의 삶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여기까지 걸어왔다. 이 길만 따라가면 '새로운 경험'이나 '넓은 세상' 같은 것들을 얻게 될 거라니, '퇴사'는 대수도 아니었다. 얻는 것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그런데, '진짜' 퇴사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면 마음의 중심이 급격하게 달라진다. 하루에 20만 원짜리 노동이 퇴사를 하는 순간 '0원'이 되어버린다거나 하는 ‘잃어야’ 하는 것이 마음을 잠식한다. 상실감에 집착하게 되면 미래에 쌓여있던 동경이 걷힌다. 휑하니 초라하다.
손실 회피 편향이라는 심리 용어를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잃을게 회사 밖에 없을 때 떠나야 한다고 일러주던 누군가의 조언을 자꾸만 더 꽉 쥐게 되는데, 쥘수록 모래처럼 새어나간다. 잃을 것이 정말 회사밖에 없다면 기쁠 테지만 그렇지 않음을 안다. 그럼 뭘 얼마나 더 많이 잃어야 하는 건가.
선택은 포기를 수반하고, 포기는 걷잡을 수 없는 ‘상실감’을 수반한다. ‘퇴사’나 ‘유학’이라는 케케묵은 단어를 들추어보니 ‘상실감’ 같이 생긴 것들이 바글바글하다. 뭐, 소속감이나 사회적 정체성 같은 것들? 퇴사를 고민한 짬이 얼마라 역할 놀이를 하던 그런 우스운 옷은 진작 벗어냈다. 그런데 극복해내지 못한 채로 이 시절에 버려질 온갖 종류의 감정들은 어떻게 데려가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난생처음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해보며 미성숙한 감정들을 많이도 낳은 탓이다. 드러난 모든 미숙과 경솔을 깎고 다듬어 이곳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죄송한 사람들만 가득 남고 말았다. 헤어짐(아니 상실)이 아쉬워서 '당신은 정말 좋은 동료였요' 하는 식의 말을 건넨다. 그런데 차마 건네지 못한 문장이 목구멍을 '턱'하고 막는다.
"당신만큼 좋은 동료가 되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요."
이제 몇 달 뒤면 정말 떠나야 하는데, 엄마와 주고받던 시답잖은 농담이나 강아지를 쓰다듬다 풍기는 꼬소한 냄새, 문화적 안정감 같은 것들도 캐리어에 담을 수가 없다. 삶의 허리춤을 잘라내어 관찰해 봐도 그 인생이 실패인지 성공인 지는 모른다지만, 성격 급한 혹자가 "너 그거 실패야" 하고 단언해 버릴 것만 같다. 미완성인 채 널브러져 있는 이 시절을 온통 챙겨가서 고쳐볼까. 그럼 이 시절의 나를 언젠가는 완성할 수 있을까.
나는 완성하지 못한 채 결국 썩어버릴지도 모를 이 시절을 '상실'하는 것이 두려웠다.
내 인생을 내 방식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감을 버텨야 하는 일이었다. 표지판만 따라가던 삶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울 줄 알았지만, 이건 공기 같아진 이 편안한 일상을 내 손으로 제쳐두고 떠나는 일에 가까웠다. 미래의 어느 날에는 자책과 후회에 숨이 막힐지도 모를 일이었다. 회사 시스템을 탓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하던 손가락이 "다 네가 자초한 일이잖아"라며 나 자신을 향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그 삿대질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상실감의 탓을 스스로에게 돌리지 않으려면 우선 나를 신뢰하고 존중해 주는 마음이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나는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가’, ‘나는 나를 얼마나 존중하는가’하는 물음이었다. 스스로의 판단과 능력을 믿어주는 마음의 근육이 없으면 나다운 삶을 선택할 용기를 낼 수 없다.
우선, 선택의 결과가 어찌 됐든 ‘성공의 덕’이나 ‘실패의 탓’이 온전히 나 자신이라는 것이 아주 괜찮아야 했다. 그래야만 역경이나 후회의 순간이 와도, '세상을 탓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삶의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살아가는 능력을 가졌대도 '고난과 역경'이 없는 삶이 있을까 싶지만.) 어찌해도 예측하지 못할 것이 인생이라면 나의 선택을 믿기로 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의 동아줄을 '막연한 낙관'이 아닌 나를 향한 ‘깊은 신뢰’로 꿰어보기로 했다.
잃게 될 것과 얻게 될 것을 가치의 저울에 올려본다. 비등하다. 시간에 따라 바래지는 정도를 무시한다면 이 삶과 저 삶에 대한 주관적 가치는 더더욱 균형을 이루어낸다. 아무리 만족스러운 삶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릴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왜 나는 상실감을 앓아가며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것일까?
상실의 크기만큼의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원하는 삶'이 결심과 실천으로 구체화될 때, 그 가치의 진실성을 가늠하기 위한 것이 '상실감'이 아닐까. 그렇기에 저울이 저리도 균등한 것이라고 여기고 싶다.
회사를 떠난다는 것에서 느껴지는 상실이나 단절이 '선택'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과정임을 받아들여야 퇴사가 슬프지 않다. 그리고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저울의 양팔은 조금씩 짧아진다. 양 쪽에 놓인 것은 마침내 어느 날 하나의 삶이 될 것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하지만, 이제야 그것을 직면할 용기가 났다. 내가 잃기를 두려워하던 것들은 그만큼 소중했다는 반증이었다. 앞으로 주어질 행복의 속성을 잘 알아차릴 자신이 생겼다. 그것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며 살면 되는 일이었다.
오늘의 상실감을 나침반 삼아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이젠 정말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