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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사랑하는 마음

이것을 알아차리니 이제야 떠날 용기가 났다.

by 엄지

회사에서 내가 맡았던 업무는 '발전소 계측제어설비 유지보수'였다. 전기를 만드는 발전기를 우리 몸에 빗대어 본다면 이 몸 곳곳에는 신경세포 역할을 하는 다양한 센서들이 붙어있는데, 나는 이 센서들과 그것을 감각하는 두뇌 시스템을 살피는 일을 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했다.


업무 경험을 살릴만한 학과를 몇 개 추린 후, 유학원에서 요구한 서류들을 차곡차곡 준비했다. 한때 내가 '몇 점짜리‘인 지 증명해 주던 서류들이었다.

공기업의 블라인드 채용으로 인해 필요가 없었던 대학교 성적표는 이제야 빛을 발했다. 취업 준비할 때 반짝 요긴하게 쓰인 후, 지금은 한 달에 5만 원 남짓의 수당을 책임지던 전공 관련 자격증들은 다른 쓸모를 찾게 되어 기쁜 모양이었다. 학업 계획서를 포함한 지원서의 영작은 똑똑한 GPT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대학원에 지원서를 제출했고, 두 곳에서 조건부 합격메일이 날아왔다. 그 조건은 '영어 점수'였다. 입학까지는 6개월, 나는 허겁지겁 김칫국을 들이켜며 설레는 마음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유학 타임라인>
D+1 유학원 상담(학교, 학비 등)
D+213 서류 및 레주메 1식 유학원 제출
D+214 대학원 지원
D+215 A학교 Conditional Offer 수신
D+232 B학교 추가 요구 서류 제출
D+252 B학교 Conditional Offer 수신




'나 이러다 진짜 퇴사하는 거 아니야?'


사실, 이 순간까지도 퇴사를 결정하지 못했다. 공기업에는 최대 5년의 '유학 휴직' 제도라는 멋진 대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회사를 떠날 궁리를 하면서 회사 제도에 기대 보려니 영 떳떳하지 못했다.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묘한 심리 기제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의 퇴사를 '타인'에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고, 이참에 회사를 더 싫어해 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치기 어린 방어기제였다. 나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공감을 구걸해야 했고,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더 악독한 마음으로 무장해야 했다. 무엇을 미워하는 이 악마 같은 마음에는 금세 재미가 붙었고, 입꼬리 한쪽을 올려가며 회사가 싫은 이유를 줄줄이 읊어댔다. 그런데도 상처받은 마음은 도통 아물지를 않아서, 툭하면 눈물을 쏟았다.


의미 없는 시간만 주야장천 갈아내는 사무실 파쇄기는 '삐비빅' 하며 하루에도 수차례 파업을 선언했는데, 대충 달래어 종이를 욱여넣으면 다시 잘 받아먹었다. 나는 꼭 내 모습 같은 저 성난 파쇄기를 곧잘 달랬다.


“저 봐라, 무단 퇴근하는 저 과장놈 보다는 네가 백 배는 낫지. 두 시간만 더 힘내봐.”


그러면 파쇄기는 다시 우걱우걱 종이를 받아먹었다.


"언니, 요즘 기분은 어때?"

여느 때처럼 나의 '신명 나는 회사 욕'을 들어주던 동생이 이렇게 물었다. 나는 이 간단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잠깐만, 나 퇴사를 하려 했던 이유가 뭐였더라?'

대답을 얼버무려야 했던 이유는 내 안에서 떠오른 이 질문 때문이었다. 나는 그제야 부정적인 마음이 본래의 결심을 흩트려놓고, 자꾸만 바깥의 눈치를 살피게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회사가 미운 이유를 아무리 맛깔나게 읊어봐도 퇴사를 위한 선명한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나와 회사는 한바탕 싸웠다고 "우리 그만 헤어져!"를 외칠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사랑 호르몬에도 '소비기한'이 있다고 했던가. 누구의 말마따나 회사 생활 '대망의 3년 차'가 되니, 정말 나에게도 권태라는 것이 찾아왔다. '즐거움'의 끝이 '권태'라는 말은 정말이었다. 즐거웠던 회사 생활, 그 몰아치던 '사랑 호르몬'이 걷히고 떠오른 나의 권태는 ‘미움’이라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움. 그것을 거둬보니 타성에 짓눌려있던 마음들이 그제야 살며시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것은 사랑의 또 다른 모양인 '그리움’이었다. 나는 이별을 앞둔 연인의 마음처럼, 못다 한 애정이 다시금 사무치게 일어남을 느꼈다.


사실 미운 사람들이야, 늘 함께 혀를 내둘러주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훌훌 털어버리면 그만이었다. 묵묵히 뭐든지 곧잘 해내시던 멋진 선배와 동료들을 보고 있으면 소위 말하는 '회사뽕'은 금방 다시 차올랐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서 고개를 돌리면 창가에 비친 차장님의 뒷모습이 보였다. 책임과 희생은 다 짊어지시고 지식과 공은 나눠주시던 나의 차장님을 닮으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늘 나를 예뻐하시던 미화 여사님들과 함박웃음을 주고받던 순간이 좋았고, 새벽에 울리는 급한 회사 전화에 한달음에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고선 자기 효능감에 푹 빠져 기분 좋게 잠들던 순간이 좋았다. 야근 후 부딪히던 맥주 한 잔에 담긴 고단함과 해방감이 뒤섞인 시원 쌉쌀한 맛도 끝내줬다. 협력회사에서 방문하는 날에 뭐 하나 더 배워보겠다며 이것저것 캐묻다가 듣게 되는 기분 좋은 잔소리도, 출퇴근길 초소에서 보안회사 대원님들과 나누던 우렁찬 인사도 귓가에 맴돈다. 출퇴근길 시골 풍경도, 산으로 둘러싸인 일터에서 늘 맡던 풀 내음도, 비 오는 날이면 올라오던 비 비린내 같은 것들도 참 좋아했다.


나열하면 끝도 없는 이 감각들을 기어코 아리느니 차라리 미워하는 편이 편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나는 회사를 생각보다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이것의 정도는 ‘미워했던 마음’, 딱 그만큼이었다.


잊었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어떤 인생을 여행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보고 싶은가. 죽음 직전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까.


그리고 그제야 퇴사를 정말 결심할 수 있었다.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삶의 다양한 가능태 중 하나를 골라내는 일은 행복해서 머무른다거나 불행해서 떠나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었다. 산봉우리 위에서 하산을 결심한 이유는 마주한 절경이 아름답지 않아서가 아니라, 또다시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 높이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풍경이 있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내가 이곳을 오른 이유는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이 산에 발을 딛고 서보는 것, 그것이 목표였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당신도, 이제 막 오르려는 당신도, 정상에서 '야호' 하고 외치고 있는 당신도, 정상에 닿지 않고 내려가기로 한 당신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유로 산을 오르고 내린다.


돌아 내려가는 길은 사뭇 길었다. ‘내가 이렇게나 먼 길을 걸어왔던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집착이나 자책, 열등감과 우월감 따위를 덜어낸 가방은 더욱 가벼워져 있었다. 정상에 올라 구석구석 눈에 담아보고 싶었던 것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미련의 마음은 슬프지도 아쉽지도 않았다. 수없이 반복될 사계절과, 새로 올라서게 될 수많은 산봉우리가 있기 때문이고, 그 보고 싶었던 마음들은 어디선가 다시 또 만나리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봄날, 사랑했던 나의 퇴근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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