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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떠날 회사를 출근하는 마음

사직서를 제출하던 날

by 엄지

영업일 3일 만에 비자가 승인되었다. 유학원의 도움이 있었고, 이런저런 조건들도 잘 맞아떨어져서 일찍 승인이 났다. 만 30세 이하, 석사과정 지원자라는 점, 내 학력과 경력이 공부하려는 스토리와 잘 어우러진 점 등이 좋게 작용했다. 이렇게 깨끗한 유학생의 이미지는 빠른 비자 승인에 긍정적 요소가 된다.


이제 비자가 나왔으니 이제 사직서를 쓸 명분이 확실해졌다. 그런데도 일주일 내내 사직서 제출을 망설였다. 계속 망설이는 스스로가 우스워 보였다. 어차피 쓸 거면서 몇 날 며칠을 주저하고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에라 모르겠다' 기법이다. 그렇게 나는 결국 '냅다' 사직서를 올렸다.


사직서는 다음날 아침 출근해 보니 결재가 완료되어 있었다.


"차장님, 이리 중요한 문서를 이렇게나 빨리 결재하시면 어떡해요."

허탈한 마음에 괜히 차장님께 장난을 쳤다.

그런데 내뱉는 그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저 문서는 내 삶을 아주 바꾸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의 눈에 담기는 주변 풍경이 아직도 여전하다. 그래서 나도 그저 하던 일을 마저 하고 만다. 주위의 동료들도 묵묵히 일을 하고 있다. 사직서까지 냈는데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는 실감이라는 그 '감'을 잘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달라진 것이 있기는 하다.

퇴사를 결정하고 난 후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웠던 업무가, 이제는 정말 본격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것도 '실감'의 한 형태일까. 자리에 앉아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이전보다 더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이 들고, 일을 하려 해도 좀체 마음이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했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다. 입사 첫날에나 눈에 들어올 법한 것들이 마음에 밟힌다. 회사 로고는 참 여기저기도 덕지덕지 붙어있다. 괜한 애정이 든다. 사무실 올라가는 계단의 개수를 세어보며 출근을 하고, 사람들과 인사하는 나의 목소리를 의식해 본다. 출근 첫날, 우렁찼던 내 인사는 얼마간 내 몸 안에서 공명했는데, 그때의 그 느낌이 기억이 난다. 익숙해서 잊고 있던, 공간마다 다르게 나던 냄새를 깊이 느껴보기도 한다. 이 냄새들을 한 줌씩 가져가면 이곳을 오래 기억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나 어설픈 궁상을 몰래 떨고 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마음이 더 복잡해진다. 구내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씩 더 무겁다. 내가 식단을 채식으로 바꾼 후부터 영양사 언니는 내 반찬을 따로 준비해 주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내게, "이래야 편하다" 하는 언니의 말을 덥석 믿어버리고는 참 맛있게도 먹었다. 아닌 척했지만 언니의 업무에 번거로움을 더하는 일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일주일만 더 맛있게 먹고 나면 나는 이제 언니의 정성을 먹을 수가 없다. 언니는 곧 나로 인한 수고로움에서 해방된다. 나는 여기서 괜한 위안을 찾는다. 그런데 이게 또 묘한 공허함을 가져온다. 이런 날들을 과거로 보내는 것은 특히 더 많이 아쉽다. (언니 많이 고맙고 미안했어)


이제 곧 추억 아니면 기억이 되어 버릴 것들이 이제야 소중해진다. 좋았던 것들은 추억이고 나빴던 것들은 기억이 될 것이다. 추억이든 기억이든 떠나려니 아쉽다. 지금껏 돌보지도 않았던 것들인데, 떠나려니 뒤늦게 아쉬워하는 이 심술궂은 마음은 조금 못생겼다. 이 모든 것을 꽉 쥐고 있을 때는 몰랐다. 하나하나 내 손에서 모래처럼 빠져나가니, 이제야 그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별하는 대상은 이렇게 특정한 대상에 스며들어 남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옆에 있는데도 벌써부터 많은 것들이 그리워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이제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있을 수가 없다. 이미 내 마음이 퇴사 후의 시절로 가버리는 바람에, 지금의 내가 갈 곳을 잃고 퍽 우울해져 버렸다.


정말 다음 주면 마지막 출근이다. 공허함에 다다른 감정에 약간의 우울과 두려움도 섞여버렸다. 이럴 때는 다가올 미래를 그려보며 현실에서 잠시 도피하고 만다.


목전에 놓인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얼마 후를 떠올린다. 일주일만 지나면, 나는 개인 물품을 정리하고 책상 서랍을 비우고 있을 것이다. 기억이 서려있는 물건을 가지고 나가는 그 감정에는 상실감과 해방감이 섞여있다. 회사를 돌며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나 하나 퇴사한다고 눈 깜짝할 사람들이 아니니, 이별이 아쉬워도, 감정이 북받쳐도 오두방정 떨지 않고 덤덤하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렇게 마지막 출근을 끝낸 나는, 입술을 열어 몸속 가득 이곳의 냄새와 맛을 넣었다가 '후-' 하고 뱉어보고는 퇴근을 한다.


그렇게 나는 진짜 '집'으로 돌아온다. 매일 주어지던 일과가 사라지니 우울감과 불안한 마음은 더욱 증폭된다. 취준생 이후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감정이 썩 달갑지는 않다. 스스로에게 할 일을 던져주고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만나기로 한다. 어느새 일상은 다시 분주해진다. 역시 시간은 생각보다 늘 빨리 흘러간다.


드디어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이 온다. 그제야 두려운 마음과 함께 진한 실감이 찾아온다. 좁은 좌석 때문인지, 긴장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숨이 조금 막힌다. 그래서 몸에 힘을 한번 꽉 주었다가 풀어본다. 그래도 가시지 않는 긴장에 기지개를 한번 쭉 켠다. 가슴은 계속 두근거린다.


호주에 사는 동생의 집에 도착한다. 긴 비행에 몸이 무거워졌겠다. 한국과는 다른 날씨를 느끼며 허둥지둥 짐을 푼다. 첫날은 그저 자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 마당에 나와 햇빛을 만끽하는 순간이 되어서야, 그제야 후련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제 좀 무언가가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얼마간은 문득 한국에서의 삶을 떠올리겠지만,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말 것이다. 그 느낌은 기분 좋게 씁쓸할 것이고, 그저 기나 긴 여행을 온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렇게 또 조금씩 적응하며 분주하게 또 다른 삶은 시작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는 늘 이런 순간들이 있다. 익숙함을 두고 새로움을 선택하는 동안, 두려움은 여러 모양을 거쳐 설렘이 된다. 무수한 밤을 뒤척이며 고민하고 득과 실을 저울질해 보다가, 결국에는 깊은숨을 내쉬고는 마음이 내키는 곳으로 달려가고 만다. 그때마다 우리는 지나버릴 날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싫었던 날이라 해도 결국에는 애증이 인다. 그러나 또다시 익숙해진다.


그저 이렇게 반복하며 사는 거고, 그 순환이 우리의 삶을 조금씩 깊게 만드는 거라고 믿고 싶다.


언젠가 이 순간도 결국 그리워질 것이라면, 나는 또 나아갈 용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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