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사람들

돈뎃 DONDET, LAOS

by 엄용선
돈뎃 (15).JPG 돈뎃 DONDET, LAOS ⓒ 엄용선


해먹을 찾아 파라다이스에 왔다. 무엇보다 활달한 도나의 분위기에 먼저 사로잡혔고,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은 그녀의 꼬드김도 더해졌다. 모든 것은 우연에서 비롯됐지만 어딘지 필연이었을 것만 같은 여행의 연속에서 ‘이곳에 오면 낭만적인 돈뎃(Don-det)에서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던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 즈음은 다시금 혼자가 된 시간이 유독 외롭게 느껴졌을 때였다. 혼자 먹는 밥, 혼자 듣는 음악, 혼자 하는 A, B, C, D 등등. 애써 사색하려 다잡는 마음가짐도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해먹에 그토록 집착했던 건 어쩌면 외로울 시간 속에 그것만이 유일한 안식처가 돼 줄 거란 내면의 발로였을 지도. 그 시절 파라다이스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여러 이유와 상황들로 인한 선택과 비선택의 경계에서 ‘혼자’임은 여러모로 심플했다. 길 위의 인연이란 게 만남도 쉬웠지만 헤어짐에 있어서 구차함이 없던 건 바로 그 ‘혼자’라는 존재감에 있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여행자로서 나의 위치, 어쩌면 나는 그 홀로임이 편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하는 여행은 홀로 걷고, 홀로 먹고, 홀로 즐기는 게 맞는 거라 생각했다. 때로 누군가를 만날 때도 홀로가 아닌 시간에서 표상은 함께 라지만 실상은 함께가 아니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기엔 거창하고 ‘혼자로의 회기’쯤으로 정리되는 여행의 패턴은 심플했다. 그리고 그 심플함 속에 도사리는 외로움은 때로는 불편했다.

혼자이기에 함께하고, 함께 먹고, 함께 즐길 수 있던 아름다운 시간들이 돈뎃(Don-det)을 흘렀다. 파라다이스한 시간 속에 무엇보다 감사하는 건, 그 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 여행이 한층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었음을 나는 안다. 떠나던 날, 그 열기가 갑자기 식어버릴까 두려워 찔끔 눈물을 보인 것도 모두 다 ‘그들’ 때문이다. 내 여행을 풍요롭게 덧입혀 주었던 사람들, 좋은 이들이 살고 있는 곳, 섬을 떠난 지금도 생각하면 종종 그리워지는 까닭이다.


라이Lai 할머니, 그녀는 그녀의 대부분을 어두침침한 이 층 구석, 그녀만의 공간에서 고개만 빠끔히 세상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마주칠 때마다 웃음으로 넘겼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라오말 ‘사바이디(안녕하세요)’를 건넬 때마다 라이 할머니는 그냥 배시시 웃기만 하셨다. 항상 무언가로 빨갛게 물든 이를 확연히 드러내시고……. 그런 라이할머니가 섬을 떠나는 날 내 손을 잡고 날 꼭 안아 주셨다. 그건 또 다른 울림이었다. 웃음 대신 눈가로 약간의 물기가 돌았다.


라오Lao, 파라다이스 살림의 전두지휘자, 라오는 덩치가 크다. 그리고 그녀의 커다란 덩치만큼 넉넉하다 못해 푸짐히 넘쳐나는 인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좀 양이 많다 싶은 날, 그 날은 여지없이 라오가 요리를 하는 날이니 그녀의 인심은 나도 알고 거쳐 간 게스트들도 알고 거쳐 갈 게스트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심만큼 정도 많은 라오의 특별한 자부심이 있었으니, 그것은 라오가 바로 이 섬에서 가장 먼저 란도리머신(세탁기)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섬의 여느 곳들에 비해 세탁비가 2000K 정도 더 비싸긴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자부심을 최대한 존중해 매번 그녀에게 빨래를 맡겼다.


Dam, 담은 파라다이스, 라오 식구들 중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안다. 오목조목 이목구비의 생김만큼 오밀조밀한 요리 솜씨로 게스트들의 입맛을 돋워 주는 파라다이스 최고의 요리사다. 당시 담은 임신 중이었는데 부른 배를 보아하니 8~9개월쯤은 되어 보였다. 곧 있으면 이 곳 파라다이스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 부디 바라는 게 있다면 그날이 되면 담도 새 생명도 모두 무사했으면 하는 것이다.(섬에 병원이 없어 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죽는 여자가 많다고 한다.)


Koo, 14살 소년 쿠는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시크한 소년이다. 인사를 해도 쌩, 뭘 물어봐도 쌩, 뭘 부탁해도 쌩(그래도 부탁은 들어준다.), ‘그래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고!’ 나는 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고 쿠는 끊임없이 나를 씹었다. 무시당할 줄 알면서도 건네는 한 마디는 쉽게 기죽지 않는다. 그냥 표현이 서툴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쿠가 날 보며 웃어주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이 환영이었지 실상이었는지 거듭된 물음에도 쿠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으니 풀리지 않는 신비, 영원한 미스터리다.


Bong, 쿠와 달리 웃음이 많은 아이, 볼 때마다 배시시 웃고, 과도하게 손을 흔들고, 사진 찍길 무척이나 좋아하는 봉은 Down's syndrome을 갖고 있는 아픈 아이다. 체구도 작고 말하는 것도 어눌해 당연히 쿠의 동생인 줄 알았는데 쿠보다 4살이나 많은 엄연한 형이다. 어디서 옮겨 왔는지 눈에 심한 종기를 달고 있던 봉, 병원이 없는 파라다이스 마을에서 봉은 그저 도나가 발라주는 약으로 그 큰 종기를 그나마 달래고 있었다. 그래도 늘 웃음을 달고 사는 봉은 아마 이 집안에서 가장 해피한 존재가 아닐까 싶다.


Sompon, 앙알대는 목소리가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솜폰은 올해 4살이 된 담(음식 솜씨가 좋은)의 아들이다. 이 아이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 자체로 세상의 묵은 때, 잡념, 푸념들이 천천히 씻겨나가는 듯하다. 마법 같은 목소리의 솜폰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긴 또 얼마나 잘 돌아다니는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온 동네를 휘잡고 다니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Peolum, 올해 2살 된 이 집의 막내 페오룸. 하여 모든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다. 이제 막 말을 배워서인지 띄엄띄엄 말하는 옹알이 같은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귀엽다. 페오룸은 아쉽게도 낯을 많이 가려 한 번도 내게 안긴 적이 없다. 그래도 잘 웃고, 잘 울고, 잘 먹고, 잘 기어 다닌다. 그리고 가끔은 걷기도 한다. 아장아장


그리고 Lance&Donna

이들은 정말 특별하다. 미국인 노부부 랜스와 도나가 파라다이스를 처음 방문한 것은 2007년 여름이다. 당시 9일 정도 파라다이스에 머물다 떠났고 그 후 이곳의 사람들을 잊지 못해 매해 방문하다 2010년 9월부터는 아예 이곳 파라다이스에서 머문다고 한다. 영어가 자유롭지 못한 파라다이스 식구들을 위해 Helper를 자처한 랜스와 도나는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소 스위트한 커플이다. 언제나 함께, 영원히 같이, 서로를 보듬으며 지극히 히피스런 삶 속에서 둘만의 가치를 발견하며 지키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다. 기타리스트와 가수, 뮤지션 커플인 랜스와 도나는 몇 장의 앨범을 발매하기도 한 프로 뮤지션으로 공식 팬클럽도 있다. 파라다이스 석양 속에서 튕겨지는 랜스의 기타 소리에 더해지는 도나의 음성을 듣노라면 모든 게 그저 꿈결로 아늑하기만 하다.


그 외 담의 남편인 Kam과 할아버지 Foy가 계시지만 여기서도 집안의 가장들은 그저 묵묵해야만 하나보다. 길 위에서의 만남 치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지만 유독 이곳이 가슴에 박힌 건 이토록 멋진 사람들이 사는 돈뎃의 파라다이스이기 때문이니라. 후일에 떠올려도 좋을 그런 기억이다. 그러므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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