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뎃 DONDET, LAOS
푸른빛이 강을 열면 이내 섬은 붉은 빛으로 물든다. 돈뎃dondet의 아침이 밝아왔다. 밤사이 거친 폭풍우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을 몰수한다. 곳곳에 페인 물웅덩이가 지뢰처럼 산재하면 맨발의 아이들은 첨벙첨벙 잘도 뛰논다. 방갈로 귀퉁이 거미도 밤새 안녕한 듯 느릿한 그물질을 이어간다.
돈뎃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해먹에 누워 한없이 딴생각을 하는 게 좋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식할 수 없는 그 상태가 좋다. 많은걸 떠올린 것도 같고, 또 아무 생각도 한 것 같지 않은 시간은 의외로 빨리 흐르는 Think about Nothing. 가만히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곳은 같은 프레임 안의 같은 풍경이지만 늘 미묘하게 변화한다. 요 며칠 광풍으로 요동치다 오늘은 하늘도 성이 좀 죽은 듯하다.
여기저기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는 이곳에서 해먹이 조금 불편하게 매달렸다 해도, 다 괜찮다. 까짓것 풀어서 다시 묶으면 그만이니까. 여행자들은 가끔 마리화나를 하는 것도 같지만 그것도 과하지 않으니 괜찮다. 해먹에 매달린 유유자적함에 갑자기 지나가는 보트의 굉음도,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각종 날벌레의 잦은 방해도, 그것이 비록 엄지 만한 말벌이라 해도, 뭐 괜찮다. 다리가 비비 꼬이는 종종걸음으로 겨우 가야 닿는 조금 외딴 공용화장실도, 부서져 삐걱거리는 변기 위에 불안스럽게 볼일을 보는 아슬아슬함도, 쫄쫄한 물줄기를 겨우 받으며 각종 날벌레들과 함께하는 모닝 샤워도(그나마도 물 사정이 좋지 못하면 한동안은 불가능하다.), 캄캄한 밤 플래시 불빛에 의지한 채 또다시 향해야만 하는 여전히 외딴 공용화장실도 익숙해지니 괜찮다.
방갈로 해먹에 누워 강 너머를 바라보며 좋아하는 책을 책장이 너덜 해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읽어댄다. 하늘을 보면 겹겹이 쌓인 구름은 느리게 흘러가고 한 순간 ‘휙’하고 지나가는 바람에 널어놓은 빨래가 덩달아 춤을 춘다. 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던 오후의 한때, 비지땀을 흘려가며 다녀온 산보의 막바지 거나하게 들이키는 라오비어 한 모금의 청량감이 식도를 타고 내린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서투른 합주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제법 그럴싸한 리듬으로 완성되는 돈뎃의 익숙함이 그냥 좋다.
손님이 오면 어디서든 나타나는 활달한 도나의 음성, 그녀가 쭈글한 입술을 모아 ‘휘휘’ 휘파람을 불면 그 소리의 끝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 란스의 행동은 느긋하기 그지없다. 옆 방갈로 일본인 친구는 늘 손에서 우쿨렐레를 놓지 않았다. ‘띵띵’거리는 리듬은 우리네 민요와 같았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일본 오키나와 지방의 전통음악이라고 한다. 오키나와는 그의 고향이다. 해먹에 걸쳐 앉아 강변을 바라보며 고향의 음을 연주하는 그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고향, 나의 집, 나의 가족을 생각한다. 돈뎃에 온 이후로 죽 연락을 하지 못함은 선택이 아닌 필연에 의한 것, 이곳에 닿기 전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그렇게 알라던 그때의 당부를 그대로 명심하고 있겠지? 그의 우쿨렐레 선율에 지금의 안부를 더해 나의 고향, 나의 집, 나의 가족으로의 불시착을 시도해 보고도 싶다.
우쿨렐레 선율에 란스의 기타가 더해진다. 겹겹이 쌓아진 구름 덩이가 천천히 하늘 길을 열면 두 남자의 선율이 파라다이스 허공에서 묘하게 믹스된다. 그 곁으로 무심한 듯 읊조리는 도나의 음성이 공존하니 하모니는 점점 고조를 타고 그네들의 파라다이스를 완성한다. 낭만으로 점칠 된 시간의 연속에서 건너의 방갈로 독일인 여행자는 내내 읽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 도도한 시선의 끝 그녀의 시크함이 극에 달할 무렵, 굳게 다문 입꼬리가 살짝 올라 번지는 미소를 본 건 분명 허상이 아닌 실상인 것. 의지로 닫을 수 없는 청각의 굴레에 때로는 행운도 작용한다. 그냥, 무작정 좋을 그런 시간.
섬 둘레를 둘러보는 건 자전거나 도보로도 충분하다. 밤사이 내린 비로 조금은 질척거리지만 꺼릴 것 없는 걸음은 뚜벅뚜벅 잘도 간다.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 켄Ken과 함께 브리지 산보를 나선다. 알고 보니 컨츄리가이였던 그 친구는 나무나 열매, 동물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 자연에 해박한 아이였다. 무작정 걷기만 하면 지나치는 풀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매달린 열매와 작은 벌레들까지, 친구의 입에선 백과사전 지식들이 마구 쏟아진다. 발길에 닿는 흙길의 생경함만큼이나 나는 참 많은 것들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생각한다.
나무 아래 아름드리 그늘이 드리우면 한 무리의 소녀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면 둘러앉은 가운데로 수북이 쌓여있는 정체모를 풀무더기가 보인다. 그것이 아이들의 유일한 군것질거리가 되어 소곤소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내가 소녀들에게 ‘사바이디’ 잠시 함께해도 되겠냐는 인사를 건넨다. 이내 수줍은 미소가 번진다. 소녀들은 쭈뼛거리며 서로의 엉덩이를 좁히더니 켄과 나를 위한 얼마간의 자리를 내어 준다. 우리들의 엉덩이가 그곳을 비집고 들어가면 한 소녀가 그 정체모를 풀을 한 포기 건네준다. 그네들이 알려준 방법대로 흙먼지를 털고 껍질을 까서 ‘우그적’ 씹어보는데 ‘윽!’ 이건 대체 뭔 맛이란 말인가?!
쓰다. 그냥 무작정 쓰기만 한 그 맛에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이다. 우리를 빤히 보는 소녀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다시 씹으라면 절대로 못 씹을 그 풀을 또다시 권하는 아이에게 순간 꽤나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키득거림이 웃음보를 간질이더니 이내 ‘빵’ 터진다. 이런 개구쟁이들! 그런데 너희들, 너희는 어쩜 그렇게 맛나게 씹어 먹을 수가 있는 거니? 그 요상한 풀을……. 그 정체 모를 풀을…… 돌아오는 길, 뭔가 당한 것 같다는 친구의 말에 나 또한 그러하다 수긍하면서도 그것이 억울하기보단 오리어 기분 좋아지는 건 돈뎃, 그 곳이 전하는 해피바이러스 때문일 것이다.
섬을 잇는 길은 이웃 섬, '돈 콘donkhon'으로 이어진다. 그 브릿지의 관문에서 잠시 쉬며 라오비어 한 모금을 들이키니 시원한 맥주의 청량감이 식도를 타고 흐른다. 저문 강 그늘에 앉아 만끽하는 칵테일 한 잔의 여유도 눈앞으로 붉게 물든 황홀경에 묻히고, 하루의 해가 저문 섬 주변으로 캄캄한 어둠이 또 다시 찾아온다.
어둠 속 파라다이스 방갈로는 점점이 백열등 노란 불빛으로 은은하다. 산보에서 돌아온 켄Ken은 밤에도 어김없이 우쿨렐레를 잡는다. 어둠의 강을 건너 어딘지 구슬픈 선율이 귓가로 와 닿는다. 그러자 ‘스르르’ 눈이 감긴다.
-Sorry?
오른쪽 방갈로 웨스턴 청년의 부름에 눈을 뜬다. 청년의 손에 직접 만 마리화나 한 개비가 들려 있다. ‘하- 이봐 난 별로 흥미 없다고!!’
- No. Thanks.
마리화나 끝에 불꽃이 붙으면 희뿌연 연기가 공기로 흩어진다. 스멀스멀 그 향이 바람을 타니, 달콤한 선율에 취해, 야리꾸리한 마리화나 향내에 취해, 무엇보다 짙은 어둠에 취해, 이 모든 것이 적절히 믹스된 야릇한 분위기에 취해, 희미한 백열등 불빛에 의지한 채 펼쳐진 노트 위로 쓸모없는 낱말들이 채워진다. 그 순간 켄의 선율에 더해지는 란스의 기타! 그 위로. 허스키한 도나의 음성이 함께하면, 아, 이게 바로 뿅~가는 기분……. 도대체 마리화나 따위가 왜 필요한 거야?
‘배고프지 않느냐?’던 누군가의 도발에 불 꺼진 밤, 그나마 영업 중인 레스토랑을 찾아 파라다이스 여행자들이 어둠의 섬길을 더듬는다. 도착한 그곳에서 되는대로 허기를 달래며 그들과 함께하는 다국적 수다 속에 어쩔 수 없이 팔구십을 강으로 흘리는 막귀라지만, 마리화나 웨스턴 청년의 서툰 젓가락질을 무심코 보는 것만으로도 무작정 좋기만 한 라오스Laos 남부 씨판돈SiPhanDon, 그곳의 작고 조용한 섬 돈뎃dondet을 흐르는 시간은 이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그러므로,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