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길 위에서 인생의 ‘섹시함’을 배운다.
같이 가지 않겠냐?’는 그녀의 제안에 ‘그러마’ 따라나선 건 ‘그곳에 가면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그녀의 유혹이 통한 까닭이다. 이미 어둑해진 길을 그녀와 둘이 나선다. 가로등마저 희미한 골목에서 그 보다 더 짙은 침묵이 발끝에 차인다.
“음악 좋아해?”
먼저 소리를 낸 건 그녀다.
“어. 그런데 잘 하진 못해”
“나도 그런데”
그녀도 나도 음악엔 젬병인 사람들이다.
내 여행이 풍요로워 질 거란 기대에 기타를 배운 적이 있었다. 기타 하나 달랑 메고 거리를 누비는 낭만자객은 상상만으로도 황홀하니 세포 끝까지 충만한 의욕은 거칠 것이 없어 뵀다. 그러나 냉혹한건 현실이었다. -78.5℃의 초강력 드라이아이스가 주위의 열을 빠르게 냉각시키듯 펄펄끓는 열기는 현실의 벽 앞에 급속도록 식어갔다. 육 개월의 고행은 손가락 끝에 알싸한 아픔만 남긴 채 허무하게 끝이 났고, 나는 무모했던 도전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기타는 길 위에선 너무 큰 짐이라며, 스스로의 실패를 되도록 합리화 했다. 확실히 음악은 여행을 풍요롭게 한다. 길 위에서 만난 모든 음률들이 그것을 증명했고 그 순간들을 나는 기억한다. 내 앞에 놓인 것은 비록 다루지 못할 ‘선율’이라지만 상상 속에서 그것은 화려하게 튕겨진다. “다시 태어나면 음악 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나의 말에 그녀의 고개가 가만히 끄덕인다.
“다 왔어. 여기야”
우리가 도착한 곳은 쌈센거리(Sam Sen Road)에 있는 ‘블루스 바’[Adhere the 13th Blues Bar]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이미 라이브가 한창이다. 열 평 남짓, 작은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엄청나다. 쿵쾅거리는 리듬을 타고 ‘바운스, 바운스’ 심장이 요동친다. 마침 빈 테이블이 나와 그녀와 내가 그곳에 자리 잡는다. 이 시간에 빈자리가 있다는 건 행운이라며 그녀가 기뻐한다.
종업원이 다가와 테이블 위로 메뉴판을 던지듯 놓고 간다. 캐주얼한 복장에 슬리퍼를 질질 끈 모습은 좋게 말해 자유롭다. 메뉴판에 적힌 숫자들은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배낭 여행자들에도 부담이 없다. 그녀와 나는 가볍게 맥주 한 병씩을 주문한다. 역시나 종업원은 맥주를 던지듯 놓고 간다. 맥주는 시원하니 살얼음도 약간 돈다. ‘톡’ 쏘는 청량감이 식도를 타고 넘자 ‘찌릿찌릿’ 리듬은 절정을 향해 빠르게 치닫는다.
드러머는 마지막 리듬에 맞춰 있는 힘껏 스틱을 내리친다. ‘꽝’하는 굉음에 시간은 얼고 리 플레이 버튼에 맞춰 함성이 뒤따른다. 뜨거운 함성이다. ‘휙휙’ 여기저기 휘파람도 요란하다. 벌게진 얼굴, 차오르는 숨, 땀으로 젖은 티셔츠는 그들의 연주가 얼마나 격했는지를 말해준다. 열띤 환호에 격양된 멤버들이 알아서 분위기를 부추긴다. 함성은 커지고 메아리는 웅장하다. 젊은 밴드는 앞으로 자신들이 태국의 대중음악을 이끌 ‘혁신의 밴드’가 될 거라는 호기로운 끝 인사도 잊지 않았다. 예술가는 ‘자뻑’만이 살길 이라는 어느 미술인(홍이현숙 설치미술가)의 인터뷰(아래) 가생각난다. 그들의 우월한 유전자(DNA)를 위해 손바닥이 터져라 박수를 친다. 더불어 목청도 드높다. 돌아보면 그녀도 그러하다. ‘짠’하고 마주치는 맥주병의 부딪힘이 경쾌한 울림을 생산한다.
그때, 할아버지 한 분이 어슬렁어슬렁 무대로 나오신다. 걸음걸이도 뒤뚱뒤뚱, 흰 수염 덥수룩한 그 모습이 영락없는 우리네 할아버지 그대로인 그 분은 다만 키가 좀 멀뚱한 것이 덩치도 좀 있으셔서 ‘아, 젊은 시절 한 가닥 하셨거니’ 어렴풋이 짐작이나마 할 뿐이었다. 그냥 음악을 좀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런 할아버지가 그만 분위기에 취해 뒤뚱뒤뚱 걸어 나오신다. 들고 있던 잔을 미처 내려놓지도 못한 채 삐걱 의자가 아슬아슬하게 딸려온다. ‘덜컥’ 그 위로 그 분의 육중한 몸뚱이가 쏟아진다. ‘어, 이건 뭐지?’ 하는 순간, 기타를 잡는 그 손에서 기가 막힌 선율이 뿜어져 나온다. 이건 뭐…… 그냥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두 발을 쿵짝쿵짝, 어깨는 들썩들썩, 온 몸으로 리듬을 타는 그 모습이 너무도 신나 보여 그 자체로 내가 다 신명난다.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들마저, 티셔츠 너머로 자연히 그려지는 축 처진 뱃살마저, 뒤뚱뒤뚱 불안하기 만한 늙은이의 걸음걸이조차 더 없이 섹시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아, 사람이 이렇게도 즐거울 수도 있는 구나. 무언가에 취해 있다는 것, 순수하게 그것을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혼신을 다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있다는 것, 그것이 나는 또 미치도록 부럽기만 한 밤이다.
빨간색 수은 줄기가 식도를 타고 오른다. 뜨거웠다. 목마른 목이 탄다. 테이블 위에 맥주병이 보인다. 겨우 한 모금 남은 양을 훌쩍 털어버리지만 맥주병은 이미 살얼음을 벗은 지 오래다. 슬리퍼의 종업원은 이번에도 맥주를 던지듯 놓고 간다. 서리 옷을 다시 입은 병은 보기에도 시원하다. 찌릿한 맥주의 청량감이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4도씨 알콜 기운이 혈관을 타고 번진다. ‘그곳에 가면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그녀의 유혹은 옳았다.
흥분된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며 돌아오는 길목에서 그녀가 물어온다.
“멋지지?”
“매우!!!”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아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다. 눈가로 언뜻 물기가 좀 도는 것도 같다. 그것은 어둠속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영롱함이다.
처음 여행을 결정했을 때 ‘잘’ 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생각났다. ‘무엇’을 잘하겠단 생각보다 ‘무조건’ 잘하겠단 다짐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잘하려 했던 것일까?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는 어느 여행자의 말은 거창했다. 긁어 부스럼 나는 길 위에선 코 파다 피만 안 나와도 다행이었다. 하루하루가 파란만장한 시간 속에 나는 조금씩 지쳐 갔다. 무언가에 취해 있다는 것, 순수하게 그것을 즐길 수 있다는 것, 그렇게 혼신을 다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을 거다. 인생을 즐기면서 그렇게 섹시하게.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인생을 정말로 'Blues'하게……. 긁으면 부스럼 나는 길 위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 오늘도 나는 여행의 길 위에서 인생의 거창함에 대해 코딱지만큼 이해해 본다.
돌같이 단단한 마음도 세월 앞엔 모래성(김시종, 세월)이라는데 그 세월에 더해진 풍류는 그 같은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허문다. 특히 여자들의 마음을 말이다. 연주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수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여자들 대부분은 외적으로 섹시했고 그 섹시함 안에서 할아버지는 내적으로 빛나는 사람이다. 나는 오늘도 길 위에서 인생의 ‘섹시함’을 배운다.
-블루스바
Adhere the 13th, Blues Bar _ 13 Samsen Road, Bangkok, Thailand
카오산로드에서 삼센로드를 향해 북쪽으로 직진하다보면 왼편에 위치. 밤10시 이후 피크타임이다. Tel_089.7694613
-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작업을 계속하며 살아왔다는 게 신기하다. 12번의 개인전과 수많은 전시회. 쉬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 번의 전시는 내게 한 번의 기적이었다. 작가로 산다는 게 사실 무슨 견디기 시합 같다. 돈 없이 견디기, 주목 없이 견디기, 영감 없이 견디기, ‘자뻑’하는 힘이 없으면 길게 견뎌내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난 내가 얼마나 괜찮은 유전자(DNA)를 가졌는지 부러 떠올리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