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열하는 숫자들
일본영화 중에 69(Sixty Nine)이라는 청춘영화가 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야기는 1969년 큐슈의 서쪽 끝, 나가사키 사세보북고 3학년생 켄과 친구들이 벌이는 1년간의 유쾌한 일탈을 그린다. 당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미남배우 츠마부키 사토시가 주인공 켄, 안도 마사노부가 친구인 야마다를 맡아 열연을 펼쳤었다. '바리케이드 봉쇄하자!'는 치기어린 미션 아래 그들의 좌충우돌이 거칠 것이 없던 살아있는 영화였다.
하늘을 배경으로 영화의 타이틀 '69'가 핑크빛 볼드체로 선명한 포스터였다. 난닝구차림의 주인공은 달리고 또 달렸다. 온몸은 땀으로 흥건하고 젊음은 날것으로 파닥였다.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에는 희열감이 서려있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감을 나타내며 뒤따르는 카타르시스는 찌릿한 감정배설이다.
“제목이 ‘69’야? 짱이다!!”
친구 중 한 놈이 뭔가 굉장하다는 듯 목소리를 드높였다. 옆에서는 또 다른 친구의 키득거림이 들려온다. 그 키득거림은 나를 비롯한 나머지 친구를 일순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그 웃음의 원동력을 알 길이 없었다.
[69 : 흔히 말하는 구강성교를 말한다. 서로가 입으로 상대의 성기를 애무하는 행위, 마치 숫자 69같은 자세를 취한다고해서 식스나인이라고 부른다.]
예상치 못한 검색결과는 당황보다 호기심을 부른다. 시선은 빠르게 다음 텍스트를 섭렵하니, ‘69체위' 또는 줄여서 '69'는 성행위의 한 종류다. 이 자세에서는 두 명의 사람이 한 사람의 입에 다른 사람의 성기가 가까이 위치하여 동시에 구강성교를 하기 좋도록 자리를 잡는다. 이 자세는 동성이나 이성끼리 모두 사용할 수 있다. '69'는 성행위를 하는 두 사람의 머리와 몸을 단순화시킨 모양이 아라비아 숫자 '69'와 흡사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위에 올라타거나...(이하생략)
대학시절 군대 간 친구로 부터 받은 편지가 생각났다. 3장에 이르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군생활의 힘겨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편지였다. 편지 속 친구는 얼마 전 유격훈련을 다녀왔다고 했다. 지옥을 경험했다는 말은 표현력의 한계에서 오는 답답함이라며 ‘유격 PT체조’, 특히 '8번'의 고통을 설파했다. 1번부터 15번에 이르는 체조의 명칭과 동작설명은 꼬리를 무는 텍스트의 나열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무언가 였다. 친구는 '8번'을 콕 집어 ‘죽여버린다’했지만 내 보기엔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어 뵈는 '1번부터 15번'이었다. 당시 친구의 편지 속에서 숫자는 고통을 상징했다.
영화 69(식스티나인)의 키득거림 이후 나는 숫자란 PT체조 외 사람의 체위(몸짓)에도 쓰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이때의 숫자는 희로애락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니 숫자는 만국공통 상형문자가 틀림없다. 불붙는 69, 토라진(혹은 지친) 96, 달달한 99, 11은 첫 경험을 상징하고 71은……. ‘69’를 19금으로 배운 탓일까? 이후 숫자에 대한 연상은 대부분 그쪽으로 특화 되었다.
그날은 방콕에 머무는 한국인 장기 여행자들이 모여 김치를 담그기로 한 날이었다. 우선 필요한 재료를 나열하고 그것을 또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과 대체 가능한 것들로 나누었다. 그런다음 사람들은 우르르 근처의 시장을 향하였다. 테와랏은 방콕 현지 서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도시의 재래시장이다. 입구로 들어서니 싸구려 생선의 진한 향내가 사방으로 농축되어 강하게 밀려왔다. 손바닥만 한 생선은 원형의 나무통에 담겨 산처럼 쌓여있다. 태국에서 흔하게 잡히는 민물 생선의 한 종류로 3마리 한 묶음에 10밧, 우리 돈으로 400원 정도니 싸긴 엄청 싸다.
‘어이~어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부름에 돌아보면 커다란 광주리를 이고 있는 사내의 갈 길이 막혀있다. 재빨리 길을 터준다. 웃통을 벗어 버린 사내의 맨 몸으로 다부진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보며 불현듯 숫자 8이 떠올랐다. 다소 길쭉한 8, 그것은 남자의 늠름함을 상징한다.
여자는 벽 쪽을 향해 누워만 있었다. 달달거리는 선풍기가 겨우 더위나 달래주는 현실에서 여자의 토라짐은 무엇에 기인하는 걸까? 멀찍이 떨어진 남자의 손에는 부체가 들려 있다. 얼마나 부쳐 댔는지 모를 그것은 낡아빠진 몸체를 하고 너덜 했고 초점을 알 수 없는 시선은 허공을 무료하게 맴돌았다. 이따금씩 그것은 여자의 볼록한 엉덩이로 꽂혔지만, 그 이상의 무엇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곧바로 숫자 '74'를 떠올렸다. 꼬꾸라진 '7'과 죽어버린 '4'가 그 곳에 있었다. 무료함이 지나쳐 자칫 평화로 치부되기 십상인 그곳에서 행운은 꼬꾸라지고 영혼은 죽어있다.
저 멀리 일행들이 나를 부른다. 미션을 클리어 했느냐는 물음에 팔을 머리위로 한껏 올려 커다란 원형을 그린다. 그것은 'OK'를 의미하며, 숫자로 치자면 '8'쯤 될 것이다. 그것은 약간 붕떠있는 '8'이다.
ⓒ 엄용선 wastestory@naver.com
♣태와랏시장
태국 방콕의 재래시장, 관광객들 보다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시장이다. 카오산로드에서 쌈쎈을 거쳐 위로 올라가면 나온다. 카오산에서 도보 30분 정도 소요된다. 다리를 중심으로 오른쪽이 태와랏 시장(재래시장) 왼쪽이 테웻원예시장으로 두씻쪽 위만맥궁전이나 아난따싸마콤궁전 여행시 들려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