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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코리아 Jul 24. 2018

어른이 되면, 동생 혜정이의 시설 밖 400일의 일상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 님 공개 강연회 

저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유가 주어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나이. 혼자 여행을 떠나고 친구들과 어울려 맥주 한 잔 마시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일들이 당시에는 무척이나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습니다. 그 시절엔 새로운 것들, 특히 어려서 허락되지 못했던 것들을 흡수하느라 바빴습니다. 많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생기를 뿜어내느라 얼마나 빛이 났는지. 제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고 찬란했던 시절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생각 많은 둘째 언니 혜영 님을 알게 된 건 우연히 본 영상에서였습니다. 시설로 보내진 동생 혜정이와 18년을 떨어져 살다 시설 밖에서 다시 살게 된 일상 속 이야기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설로 보내진 혜정에게도 본인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마주했을 때, '탈시설'이라는 단어를 마주했을 때 저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주어진 '자유'가 특별한 것이었음을, 누군가에게는 제가 누린 평범한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닷페이스 .face 영상 - 장애인 동생과 나, 시설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혜정이는 가끔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때면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어."

스물을 훌쩍 지나 서른이 가까워오는 혜정이의 입에서 "어른이 되면"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그간 혜정이가 살아온 시간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다'는 말로 얼마나 오랫동안 혜정이는 수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을까. 혜정이에게 '어른이 되면'이라고 말해왔던 그 사람들은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언젠가 혜정이가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해보았을까?

<어른이 되면> 중에서


그 후 이원코리아 멤버들과 함께 혜영 님의 다큐 '어른이 되면'을 보았습니다. 다 같이 모여 앉아 다큐를 보면서 혜영, 혜정 자매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혜영, 혜정 자매가 다른 세상 사람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많은 분들께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행사는 SVPS (Social Venture Partners Seoul)의 주최로 진행되었습니다. 소셜벤처파트너스 서울은 비즈니스와 사회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개인이나 기업이 기부금을 모아 펀드를 만들어서 사회적 과제에 도전하는 소셜벤처를 지원 협력합니다. 이원코리아 멤버 몇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참여하는 동플(동등한 삶의 기회를 위한 플랫폼) 모임도 SVPS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강연이 진행된 헤이그라운드. 혜영님이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강연을 들으러 온 많은 관중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7월 19일, 무더웠던 여름날 두 자매를 만났습니다. 강연을 준비한 혜영 님과 여름의 생기를 품은 혜정 님과의 만남은 유쾌했습니다. 이번 '모두를 위한 이야기'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공개 강연회 현장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혜영님이 마이크를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혜영님은 푸른색 원피스를 입고 브래들리 메쉬 실버를 착용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입니다. 저는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유튜브를 2년 넘게 운영하고 있고 약 1년 전부터 '어른이 되면'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한 살 어린 제 동생은 중증 발달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어렸을 때 장애인 수용 시설로 보내졌고 18년 동안, 서른이 될 때까지 시설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외딴 산꼭대기에 있는 건물에서 자신과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돌봄을 받으며 사는 것이 혜정이의 행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것이 동생의 '선택'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생을 시설 밖으로 데리고 나와(탈시설) 지역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좌충우돌의 삶을 V-log와 다큐멘터리, 최근에 나온 책 등 다양한 형태로 저희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있습니다. 

크라우드 펀딩을 위한 '어른이 되면' 티저 영상


모임 '동플'이 동등한 삶의 기회를 위한 플랫폼이잖아요.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는 말은 저한테는 굉장히 묵직한 말입니다. 저하고 거의 모든 것이 똑같은 제 동생은 저하고 동등한 삶의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단지 중증 발달장애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요. 부모도 같고 나이도 한 살 밖에 차이 나지 않고, 성별도 같습니다. 살아보니까 성격도 꽤 비슷한 것 같아요. 동생에게 저와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을 부끄럽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저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졌던 수많은 학습의 기회, 관계를 위한 기회, 더 나은 사람이 될 기회는 동생이 시설에 보내졌을 때 주어졌습니다. 당장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동생은 기회를 차단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습니다. 그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연사로 선 혜정 님과 혜정 님의 이야기를 듣는 참석자들


저희 집처럼 혜정이를 시설에 보내고 남은 가족은 미션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성공해서 시설로 보내진 불쌍한 내 혈육을 행복하게 해주자. 그 시설을 좋은 시설로 만들어 주자. 저는 사람들이 말하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게 굉장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제가 성공을 해서 원하는 것은 사랑하는 동생을 돌봐줄 어떤 사람의 시간을 사는 것인데, '왜 나는 내 시간을 동생에게 쓰지 않고 남의 시간을 사기 위해 불확실한 목표를 위해 달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성공을 해서 시간을 살 수 있는 능력이 되었을 때 동생의 마음에서 자라고 있던 자유의 감각이 완전히 죽어버리면 어쩌지? 동생에게 자유가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생겼습니다. 


작년 6월 2일에 이뤄진 혜정의 탈시설은 그 고민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행복은 나의 노력으로 얻은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자유와 행복은 내 노력보다는 장애가 없다는 운 하나로 결정된 것은 아닐까?' 늘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가장 행복할 수 있는 순간에 가장 불행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나의 것인지, 아니면 그저 이 사회가 운 좋은 내게 내려준 축복 같은 것인지, 그것에 대해 기뻐해도 되는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이타심이 있어서 또는 어떤 비전이 있어서 동생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어서, 내 노력과 열정으로 이뤄낸 세계에서 살고 싶어서 동생과 함께 살 준비를 했습니다. 동생과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동생과 같이 살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물질적인 준비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혜정의 심적인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 능동적인 자유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자유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일어나고 잠드는 시간, 먹을 것, 내가 함께 살 사람까지 다른 사람이 정해주는 삶을 18년 동안 살았는데 너에게 자유가 필요하니 밖으로 나와 살자고 하는 것은 혜정이에게 폭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생 스스로 오랫동안 갇혀 있던 시설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최대한 많이 며칠이라도 밖에 나와 혜정이 좋아할 만한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좋아할 만한 것을 하고, 먹고, 다녔습니다. 


혜정과 함께 떠난 최초 해외여행. 일본 아오모리 여행 브이로그.


혜정과 함께 떠난 여행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연습이었습니다. 시설에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모두 좋다고 말합니다. 혜정이도 마찬가지였고 무얼 하더라도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다른 언어에 둘러싸인 새로운 여행지에서 원하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경험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혜정이도 감정이 있을까?' 의심해본 적이 있고 "발달장애인도 감정이 있어?" 누군가 물어볼 때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알았어요. 우리 사이에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본성에는 차이가 없다. 혜정이는 좋은 것과 싫은 것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고 저는 그걸 읽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혜정이에게 감정을 표현할 충분한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연 중간에 노래를 부르는 혜정 님


이 영상에는 혜정이의 장애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상은 우리 자매 둘 만의 즐거운 첫 해외여행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애에 대한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영상을 오픈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한테는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 장애인의 날에 나오는 콘텐츠, 패럴림픽, 장애를 극복하는 스토리, 장애인의 비참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면 우리가 보고 있는 쇼 프로그램, 여행 프로그램에는 장애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굳이 장애를 설명하지 않아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고 제 영상 안에서만큼은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기쁘게도 반응은 좋았습니다. 장애인, 비장애인 상관없이 우리가 태어난 곳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 그런 삶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워지도록 설득해나가는 작업을 비디오로 찍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가장 사적인 부분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고도화된 사회에서 가장 사적인 부분이 어쩌면 가장 공적인 씨앗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모임에 참가한 분들과 함께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회자로 나선 이원코리아 임동준 대표와 강연자 혜영 님이 앉아 질문을 듣고 있습니다.


퇴근길 복잡한 지하철에서 다운증후군을 가진 분과 같은 칸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알 수 없는 노래를 10분 이상 큰 소리로 따라 부르셨고, 열차 안의 많은 분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요? 

혜영: 중요한 질문이라 생각합니다. 혜정과 함께 살면서 원칙을 하나 세웠는데 그건 바로 '원칙을 갖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가 극장에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의 관람에 피해를 주는 사람을 만나봤을 거예요. 지하철에서도 눈살 찌푸릴만한 일을 한 번쯤은 경험했을 거예요. 비장애인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을 때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생각해보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작년에 서울시향에서 클래식 공연을 했을 때 자폐 성향을 가진 아이가 공연의 중요한 순간에 소리를 질렀고 어머니가 데리고 나가는 일이 있었어요. 그때 장애인의 문화 향유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가 온라인에서 설전이 오갔어요. 저는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비장애인이 공공장소에서 무례한 행동,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했을 때 우리는 비장애인을 어디까지 통제할 것인지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에게는 어떤 원칙을 세우고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말하는 점에서 이미 비장애인, 장애인을 분리하고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질문의 상황에 눈살에 찌푸려진다면 다가가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것이고, 그렇게까지 행동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그렇게 두는 거죠.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자폐, 다운증후군, 지적 장애 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습득한다면 갑자기 지하철에서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을 만나도 겁내지 않고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방법을 이미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계활동은 어떻게 하고 있나요? 생계활동을 하는 동안 동생 혼자서 있는 시간이 낯설고 두려울 수 있다는 선입견이 자동적으로 생기게 되는 것 같아 질문드립니다. 
질의응답 시간. 진심을 담아 답변하고 있는 혜영 님.


혜영: 저 같은 경우는 부모님이 동생을 시설로 보내면서 저라도 동생을 살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나올 때부터 시간에 얽매이는 직업을 갖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일을 해야 하는 시간에는 어쩔 수 없이 혜정이와 함께할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활동지원제도라는 게 있는데 중증 발달장애인을 옆에서 돌봐주는 사람의 급여를 국가가 지원해주는 제도인데요. 국가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돌봄의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멋대로 산정해서 주거든요. 혜정이가 받은 시간은 월 94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잘 쪼개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친구들 같은 사적인 자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덴마크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런 제도의 지원이 굉장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가족이 둘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제도를 만드는 일에 실제로 기여하는 것이 제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지금도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생계를 위한 일 또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분들이랑 같이 있으면 불편합니다. 장애인 분들과 잘 지내거나 친구가 되려면 특별히 가져야 할 생각이나 태도가 있나요? 
진지하게 질문을 듣고 있는 임동준 대표와 장혜영 님


혜영: 혜정이와 함께 살면서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 하나가 혜정이를 아끼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 친구여서 혜정이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혜정이의 친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혜정이의 경우 완전히 사회와 단절되어 살았기 때문에 혜정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가족 말고는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외과 수술에서 상처를 꿰매는 것처럼 인위적으로 제 친구들을 동원해서 집에서 자주 밥을 먹었어요. 집에 방문하는 많은 친구들은 넌지시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실은 태어나서 중증 발달장애인과 밥을 먹는 게 처음이야. 그런데 네 동생한테 실수를 할까 봐 겁이나.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걸 조심해야 할지 알려주면 좋겠어."


비장애인을 대하는 적절한 방법이 없듯이 장애인을 대하는 적절한 방법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나요?"라고 질문을 한다면 서로의 감정을 이해할 때라고 생각하거든요. 장애의 특성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언제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이해하는 게 훨씬 중요한 정보일 거예요. 그런 감정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다가간다면 처음에는 낯설고 실수도 있겠지만 그러면서 가까워질 거예요. 그건 장애인과 친해지는 방법이 아닌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친해지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동생분께서 평생 자립할 수 없는 상황인데 현실적으로 언니분께서 평생 책임을 지기 어려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결혼을 하신다던가) 그렇다면 동생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비슷한 처지라 여쭈어 봅니다.

혜영: 저는 혜정이가 사회로 돌아와 훌륭한 자립을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완전한 자립을 하고 계신 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심적으로, 물적으로 삶을 지탱하는 친구와 동료가 없다면 저 또한 이렇게 멀쩡히 앉아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혜정이와 저의 자립 조건은 굉장히 같다고 생각합니다. 혜정이가 자립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혜정이도 자립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요. 대신 어떤 의미로 질문하셨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당연히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혜정이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사랑할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저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에 저에게는 전혀 고민의 문제가 아닙니다. 삶에 모든 가능성이 있는데 어떤 것은 현실적이고, 어떤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미리 생각하는 순간 많은 것들이 힘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혜정이는 자립해서 잘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 삶이 어떻게 될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앉아서 경청하고 있는 혜영 님
자립에 여러 형태가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중에서 혜영 씨가 생각하시기에 지금 당장 혜정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혜영: 역시 더 많은 관계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관계는 원하다고 해서 생기는 종류의 것이 아니잖아요.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있다면 활동지원제도가 모든 장애인에게 당연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이 직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마 정도의 나이인 경력단절 여성이 많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문화적 한계가 있는데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처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활동지원제도에 대해 알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늙어갈 또래 친구가 필요하다고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2시간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이번 세미나는 개인적으로도 기대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큐에서 보았던 혜영, 혜정 자매를 만난 것도 반가웠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시간 또한 감동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비장애인, 장애인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가치에 대해 나눌 수 있는 자리여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누구도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혜영 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어린아이의 손을 꼭 잡고 온 아빠, 중학생 아들을 데리고 온 엄마, 휠체어를 타고 끝까지 함께해주신 분들, 밝은 목소리로 주저 없이 질문하던 청년, 강연이 끝나고 신이 나서 춤을 추던 혜정 님 모두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 한 몸 돌보기도 힘든 시대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돌보면서 살아갈 수 있나요?" 많은 분들이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 순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도 살아가기 힘든 사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던진 혜영 님의 말을 되새겨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쉽고 간단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평범하게 누리는 삶이 사실은 평범한 삶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해보는 것, 그래서 나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돌려보는 것, 그렇게 서로를 돌보게 되는 것. 


헤이그라운드 장소를 대관해 주신 루트임팩트, 맥주를 흔쾌히 내어주신 이원의 친구 JUMP, 강연회를 준비해주신 SVPS와 동플, 반짝이는 눈으로 강연을 들어주신 많은 분들, 흥이 넘치는 예쁜 혜정 님, 그리고 좋은 말씀 전해주신 혜영 님 모두 고맙습니다. 우린 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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