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를 처음 만난 건 두 달 전이었습니다. 꽁꽁 싸매야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추운 겨울이었어요. 발달장애 예술가들과 앙상블 연주를 하는 '어울림 예술단'서 단장을 맡고 계신 조명민 선생님의 초대로 동플 모임에 나온 그는 두툼한 빨간 패딩이 잘 어울리는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시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어요. Eone(이원)에서 일하면서 시각장애인분들을 만나는 일은 왕왕 있었지만 시청각 장애를 가진 분을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궁금했어요.
그의 이름은 박관찬. 그가 내민 명함에는 아래의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장애인식개선 교육 강사, 작가 & 칼럼니스트, 어울림 예술단 첼로 파트 단원
아름다운 생각으로 변화시키겠습니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관찬 님의 일상이 궁금해졌어요. 그날 동플 모임에 참석한 9명의 사람들과 둘러앉아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관찬 님은 가까이서 텍스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카카오톡으로 질문하면 보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시청각장애'라 하면 아무것도 보고 듣지 못한 헬렌 켈러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관찬 님은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도 가까이서 제 키를 가늠할 수 있고 카톡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시력은 남아있었어요. 시각 장애가 있다고 해서 전혀 보이지 않는 전맹만 있는 게 아니듯 시청각장애가 있어도 장애 정도에 따라 조금은 보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죠.
추운 겨울이었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은 참 따뜻했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경험이 소중했어요. 그리고 만날 기회가 없어서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관찬 님에게 문자를 했어요. 다시 한번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냐고. 제안을 흔쾌히 수락한 그는 카카오톡 소통 대신 활동지원사 분과 함께 미팅 장소에 나왔습니다. 무거운 첼로를 메고요. 아래는 그와 나눈 이야기입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박관찬입니다. 눈은 저시력, 귀는 고도 난청으로 시각과 청각에 동시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시청각장애인입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시신경 위축이 왔고, 그 영향으로 청각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까지 보고 듣고 말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말소리를 듣지 못해도 언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 얼마 전에 서울로 이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서울 살이는 어떠신가요?
저는 포항에서 자랐고 대구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했어요. 제가 장애인식개선 교육 강사를 하고 장애와 관련된 기관에서 기자로도 활동했는데 작년 10월부터 서울 / 경기 지역에서 강의가 많았어요. 체력적으로 서울을 오가는 게 쉽지 않았고 강의료나 취재비가 나와도 전부 교통비로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 장애인 대상 전세자금 대출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서울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대구에 있을 때는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편하고 좋았는데 서울에는 아직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심심할 때도 있고 약간 외롭기도 해요.
요즘 관심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요?
첼로 연주요.
첼로 연주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이 지구상에 다양한 악기가 있는데 저는 어떤 악기가 있는지, 악기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잘 몰라요. '첼로'라는 악기가 있다는 것도 2012년에 우연히 본 영화 '굿바이'에서 알게 되었어요. 납관사를 하는 영화 속 주인공 '다이고'는 마음이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첼로를 켜며 위로를 받았어요. 그 이후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는데요. 가슴에 안고 연주를 하기 때문에 심장 가까이에 닿아있는 악기가 바로 첼로입니다. 저는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마음과 영혼을 담아서 연주를 하고 있어요.
(영화 시청 방법에 대한 추가 질문: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영화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 지원,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지원은 있지만 저처럼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지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를 볼 때 대사마다 정지 버튼을 누릅니다. 대사 한 줄 한 줄을 확인하고 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됩니다.)
1주일에 몇 번 연주하세요?
거의 매일 하고 있어요. 저는 첼로를 연주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그런데 어느 날 방문에 누가 쪽지를 붙여놓았더라고요. "악기 소리가 시끄러우니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연주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제가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그 후 죄송한 마음에 집안에서 연습을 할 수 없었어요. 첼로를 가지고 밖으로 나와 대학 캠퍼스 벤치에 앉아 연습했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겨울이 되니 매서운 바람에 연습이 힘들었어요. 따뜻한 봄까지 기다려야 했는데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사라지니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내서 집집마다 쪽지를 방문에 붙였어요. “제가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지만 첼로를 연주하며 큰 행복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연주 소리로 피해를 드려 죄송합니다. 오후 1시부터 하루 한 시간 동안만 연주할 수 있게 허락해주세요.”
그날 밤부터 쪽지에 적은 연락처로 하나 둘 문자가 오기 시작했어요. 모두 마음껏 연주를 하라는 내용이었어요. 그중 가장 감동적인 문자를 보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즐거운 부분을 맘껏 즐기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당신이 듣지 못하는 소리, 제가 대신 즐길 테니 이제부터 마음 편하게 연주해주세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제게 쪽지로 첼로 연주 자제를 부탁했던 분이었어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제게 첼로가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무조건 시끄럽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셨어요. 그분이 그렇게 말씀해주시지 않았다면 저도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 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관찬님은 외향적이고 문제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해결을 하려는 분인 거 같아요. 쉽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나거나 감정을 겪을 때 관찬님만의 대처 방법 또는 마음가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잖아요. 장애인이라서 힘든 것보다는 누구나 힘든 일을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로 현실의 벽에 부딪혀서 좌절할 때도, 숨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첼로 연주를 해요.
관찬 님과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며 카톡으로 대화를 나눴는데요. 카톡으로 하기에 긴 이야기는 메일을 주고받았고요. 면대면으로 만났을 때 가장 선호하는 소통 방법은 무엇인가요?
오늘 같이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는 활동지원사분과 동행해요. 문자 통역을 해주면 노트북으로 보고 바로 대답할 수 있거든요. 일상생활에서는 손바닥 필담을 선호합니다. 손바닥 필담이 정식으로 채택된 의사소통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나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손바닥에 글을 적는 것을 신체적인 접촉으로 생각하기도 해요. 저는 수화(수어)를 조금 할 수 있는데 제가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조금 천천히 수화를 해주시면 수화로도 대화가 가능합니다.
흔히 ‘장애’가 있다고 하면 도움을 주고 배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곤 합니다. 관찬 님과 소통하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저는 고등학교까지 일반학교를 다녔는데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담임선생님을 만났어요. 그때마다 제가 잘 안 보이고 안 들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제 의사를 묻지 않고 교실 중앙 맨 앞자리에 앉게 하셨어요. 저를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은 번호 혹은 키 순으로 자리를 정했는데 제 옆자리에 앉는 친구는 자연스레 저를 도와주는 친구가 되었어요. 그 친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요. 어떤 날은 누구 한 명이 떠들어서 단체로 벌을 서게 됐는데 저는 제외됐어요. 선생님들이 저를 무조건 배려하고 도와주는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예요. 자연스레 또래 친구들은 저를 싫어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고3이 되었는데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그냥 알겠다고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 당시에는 자유 지정석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교실 뒤에 앉아봤어요. 어차피 앞에 앉아도 선생님이 하는 말을 듣지 못했거든요. 담임 선생님은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수업 중간에 "손 들어~"라고 하셨는데 가장 마지막에 손을 든 학생은 앞으로 나가 가볍게 등짝을 맞았어요. 당연히 제가 매번 걸릴 수밖에 없었는데 선생님은 예외를 두지 않으셨어요. 제가 계속 나가 등짝을 맞았는데 친구 한 명이 "제가 관찬이 대신 맞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뒤로 다른 친구들이 나와서 대신 등짝을 맞아줬어요. 조금씩 저를 이해하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한 거예요. 어느 날, 선생님이 칠판 가득 커다란 글씨로 '손 들 ㅇ-' 까지 쓰고 수업을 하시는 거예요. 수업 중간에 l를 그어 '손 들 어'를 완성하셨는데 칠판을 보지 않았던 친구가 걸렸어요. 그때는 제가 나가서 대신 등짝을 맞았어요. 선생님은 제가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을 가졌을 뿐이라는 걸 저와 친구들에게 알려주신 거예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장애인 복지 카드를 발급받았어요. 장애를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살아갈 용기가 생긴 거죠.
제가 겉으로 보면 장애인처럼 보이지 않고 시각 장애가 있는데 혼자 걸어갈 수 있으니까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시청각장애가 있어도 저처럼 조금은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조금 들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장애가 있어도 평범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어요. 그저 조금 다른 점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처음 만나면 서로에 대해 잘 모르니까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장애인도 마찬가지로 어떤 장애가 있고, 그 장애는 어떤 특성이 있는지 먼저 파악한 뒤 소통하고 함께 생활하면 좋을 것 같아요.
관찬님이 하는 일의 폭이 넓은 것 같아요. 관찬 님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가요?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어요. 지금까지는 제 이야기를 써왔지만 이제는 기자가 되어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보려 합니다. 두 번째는 첼로 연주를 할 때예요. 지금 어울림 예술단에서 첼로를 연주하고 있어요. 어울림 예술단은 첼로, 플루트,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데 재능 있는 발달장애인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단장님께 첼로 레슨을 받다가 합류하게 되었는데 제가 안 들리기 때문에 합주를 할 때 긴장을 많이 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참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만든 김형수 대표님은 미국에 거주하고 계신데요. 미국에서는 수업 시간, 세미나, 길을 걷다가도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하셨어요. 한국에서는 그게 참 어려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장애청년드림팀’이라는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갔었어요. 미국에서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자리를 비켜주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주고 기다려주더라고요. 그들에게 장애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기다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동행하면 힐끗거리며 보기 바쁘잖아요. 휠체어를 타고 버스에 승차한다 하더라도 기다려주는 문화가 부족한 것 같아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장애를 바라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관찬 님이 이루고 싶은 목표에 대해 말해주신다면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가족의 도움이 가장 컸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가족'이에요. 기자 일과 첼로 연주 활동을 열심히 하며 자리를 잡고 안정을 찾게 된다면 좋은 분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습니다. 부모님께 용돈도 많이 드리고 싶고요 :)
관찬 님의 인터뷰를 영상으로 만나보세요!
솔직히 말하면 관찬 님을 만나고 난 뒤 조금 괴로웠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회사에 출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를 만나 맥주를 마시거나 넷플릭스를 보며 잠드는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계속해서 관찬 님이 떠올랐습니다. 관찬 님보다 조금 편한 일상생활을 누리는 것이 불편했어요. 가야 할 곳의 지하철 개수를 세서 내릴 역을 확인한다는 관찬 님의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하는데 우리가 함께 편하게 살아가는 세상은 먼 세상의 일일까? 내가 가진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러던 중 4월 9일 자, 일간 이슬아 '한 번이라는 감수성 – 정혜윤 PD' 인터뷰를 보게 되었어요.
아래는 일간 이슬아 인터뷰 내용을 일부 발췌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주신 이야기를 모아 보면, 세월호 유가족들 뿐 아니라 여러 재난 이후의 사람들로까지 피디님의 관심과 노력이 확장되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9.11 참사 유가족, 대구 지하철 참사 유가족, 그 밖에도 수많은 유족들을 만나오셨잖아요. 그분들 목소리를 모으신 걸 들으며 어떤 공통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들이 슬프고 외로운 날에 기억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보다 더 슬픈 사람의 이야기요?
그 뜻이 아니에요. 그냥 세상에 나보다 슬픈 사람이 있다는 걸 기억하자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나보다 더 슬픈데, 그가 엄청난 용기를 내어 살아가고 있다는 거요. 용기를 말하는 거예요. 저 스스로한테 얘기해요. 저 사람들이 내는 용기를 봐라. 저 사람들이 내는 저 큰 마음, 저 멀리 가는 마음을 봐라. 그리고서 생각해요. 저기로 같이 가자고. 저 방향이라고.
인터뷰 기사를 보고 난 뒤 관찬 님의 용기, 큰 마음, 멀리 가는 마음을 생각해봤어요. 나와 관찬 님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누리게 될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수려한 문장을 만드는 능력이 없지만 제 글이 누군가의 시선을 바꿀 수 있다면, 더 나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 손바닥을 기꺼이 내어주신 관찬 님, 고맙습니다.
글쓴이 Rie
보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만지는 시계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판매하는 이원코리아에서 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https://eone-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