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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덴 Jul 11. 2017

자기고백 혹은 합리화, 홍상수의 정공법은 통했을까

[고덴의 영화읽기 19]  <밤의 해변에서 혼자>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리어왕은 믿었던 딸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음모에휘말려 두 눈까지 잃게 되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그리고 리어왕은 본인의 선택을 후회하며 그 유명한 대사를 외친다.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다 안다고 생각했건만 인생의 말미에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 재차 묻게 되는 리어왕의 비극을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다. 위 대사의 용법과는 조금 다르더라도 우리는 왕왕 스스로에게 ‘난 누구고, 지금 이 곳은 어디인지’를 물어보며 스스로가 잘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도 한다. 여기 또 한 명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리어왕이 있다. 그는 자신의 새 영화로 자문자답하려 한다. 

     

감독을 사랑한 한 배우의 이야기


     

새 작품의 제목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 크게 2부로 구성됐다. 우선 1부의 이야기는 독일의 어느 도시에서 시작한다. 영화배우인 한 여자는 이미 가정이 있는 감독과 사랑을 했고 그에 대한 세상의 관심에서 벗어나고자 독일로 왔다. 하지만 그녀는 독일에 와서도 온통 감독 생각뿐이다. 친구에게 그 남자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며 자신을 보러 그가 독일로 올지 궁금해한다. 


역시나 그의 영화가 늘 그랬듯 친절한 서사구조가 없이 이야기는 어느새 2부로 넘어가 있다. 2부는 강릉에서의 이야기다. 강릉으로 온 여자는 오랜만에 선배들과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시간을 가지며 자신의 속내를 모두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예기치 않게 자신의 남자인 영화감독을 만난다. 추운 겨울 홀로 해변에 누워 있는 그녀.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기고백 또는 자기합리화


     

홍상수가 다시 영화를 들고 돌아왔다. 지난 해 11월에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이란 작품을 선보였으니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새 작품을 들고 나타난 셈이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란 매우 특이한 제목으로 세상에 나타난 그는 지금까지 21년간 19편의 작품을 찍었으니 상당히 부지런한 창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참 희한한 감독이다. 기껏해야 관객 스코어는 3~4만 명 정도가 평균이고 최고 흥행 스코어가 28만 명밖에 안 되는 감독인데 대한민국의 유명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런티를 포기하면서까지 그와 작품을 찍으려 한다. 알아서 좋은 배우들이 몰리는 마치 리어왕과도 같은 막강한 권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와중에 이번의 컴백에는 특히 많은 시선이 몰렸다. 


아무래도 영화 외적인 이야기 때문이다. 스캔들로 인해 영화가 아니라 감독과 배우가 너무 많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심지어 여자주인공은 본 작품으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받아버렸으니 관심은 더 커졌다. 그래서 홍상수는 이 기회에 작품으로서 자신이 하고싶은 말들을 했다. 각자의 다른 시선에 따라 누군가에게 그 자기고백은 또 하나의 자기합리화로 보였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샤이 홍상수


     

소설이든 영화든 그 작품 속에는 창작자의 자전적인 파편들이 디테일로 쓰일 수 있다. 그 장치적 디테일들이 재배열되면 전혀 새로운 캐릭터와 서사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가 ‘픽션’인 것이다. 굳이 그 픽션들을 창작자와 완전히 동치할 필요가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홍상수와 김민희의 관계를 나타내는 디테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그 영화가 온전히 그들 관계의 데칼코마니인 것은 역시 아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하나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저열한 자기 착오와 합리화로 볼 수도 있다. 후자의 무리들은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전자들을 크게 부정한다. 최근 후자들의 지배적인 분위기로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싶음에도 눈치를 보며 당당히 그의 영화를 관람하지 못 하는 ‘샤이 홍상수’들이 많이 생겼다. 과연 예술과 윤리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샤이 홍상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은 각자의 가치관을 정리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맞기도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답하다


내가 누구인지 답할 수 있는 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홍상수는 이 영화로서 스스로 답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본인이 오르내리고 있지만 결국 본인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본인 자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이번 작품으로 모든 상황에 대한 입장정리 또는 해명을 하며 본인의 자유를 찾고 싶을 테다. 

 

어쩌면 시간이 한참 지나 요즘의 소요를 회상하며 감독은 자신의 뮤즈와 처음 조우한 작품 제목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과연 미래의 ‘지금’에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로 한 대답이 맞다고 결론날 수 있을까. 우리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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