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31] <위대한 쇼맨>
미국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작 <위대한 개츠비>의 원제는 번역 그대로 'The Great Gatsby'다. 이 작품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아직도 제목의 의도가 무엇인지 설왕설래 중이다. 개츠비는 왜 위대할까. 지고지순하게 한 여인만을 바라보고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때문에 찬사를 보낸 것일까. 아니면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행한 범법행위와 물질만능주의적 행태에 대해 반어적 의미로 형용한 것일까. 둘 중 어느 측면도 오독(誤讀)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해석의 몫은 오직 독자 각자에게 돌아갈 뿐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을 겨냥해 나온 뮤지컬 영화 <위대한 쇼맨> 역시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어있다. 원제는 'The Greatest Showman'이니 무려 최상급의 표현(the greatest)이 사용됐다. 과연 그는 정말로 ‘가장 위대한’ 쇼맨이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풍자일까.
위대한 쇼맨의 탄생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난 P.T.바넘은 부잣집 딸 채리티에게 호감을 가지지만 신분 차이라는 벽의 현실적 높이를 너무 어린 나이부터 깨닫게 된다. 그러나 채리티는 세속적인 부분에 굴하지 않고 소년의 마음에 응답하기 위해 궁전 속 공주의 삶을 과감히 포기한다. 행복한 나날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인생이란 그리 녹록지가 않다. 어른이 된 바넘(휴 잭맨)과 채리티(미셸 윌리엄스)는 곤궁한 삶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던 바넘은 고심 끝에 결심을 한다. 서커스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쇼와 쇼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위대한 쇼맨>은 서커스를 본격적으로 쇼 비즈니스로 활용하며 대흥행을 거둔 19세기의 실존 인물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영화다. <레미제라블>로 이미 뮤지컬 배우로서도 가치를 입증한 휴 잭맨과 또 한 편의 뮤지컬 명작 <라라랜드>의 음악팀이 만났다는 점에서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작품이다.
휘황찬란한 빛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위대한 쇼맨>은 우선 시각적,청각적 만족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린다.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한 화려한 서커스 쇼와 격렬한 음악은 관객들의 마음을 일순간에 빼앗는다. 또한 판타지 동화를 연상케 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배경과 아름다운 멜로디가 흐르는 장면들의 연속은 서커스 쇼 장면이 아니어도 미장센과 사운드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부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엑스맨> 시리즈와 <레미제라블> 등으로 국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외국배우 중 하나인 휴 잭맨이 화룡점정을 맡았다. 휴 잭맨이라는 흥행보증수표가 ‘위대한 쇼맨’이 되어 영화에 빛을 더한 것이다. 미셸 윌리엄스는 <더 클럽> 이후 휴 잭맨과 다시 호흡을 맞추며 안정된 연기를 선보였고, 고난이도 공중곡예를 대역 없이 해낸 두 젊은 배우 잭 에프론과 젠다야 콜맨은 이번 영화를 계기로 자신들의 이름을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만큼 짙은 그림자
하지만 빛이 진할수록 그림자 역시 진한 법. <위대한 쇼맨>은 아주 분명한 장점을 선취하는 동시에 여러 아쉬운 점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실 이 영화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은 영화다.
전체적으로 영화가 매우 크게 클리셰에 함몰되어 있고 화려한 외관에 신경 쓰다 보니 내구성을 챙기지 못한 느낌이다. 단선적인 서사 구조는 관객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관객을 번뜩이게 하는 힘이 없어 아쉬움이 크다. 더불어 그 단순한 구성에 묻혀 캐릭터들 역시 전혀 입체적이지 못 하다. 성공을 위한 욕구에 매몰되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버렸다가 결국 그들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설정은 기시감이 너무도 크지 않나.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위대한 쇼맨>의 특출난 강점이 있기에 약한 서사와 단순한 캐릭터의 클리셰는 충분히 상쇄될 수도 있다. 오히려 관객들이 뮤지컬 영화에 기대하는바 역시 눈과 귀의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화려함으로 덮을 수 없는 어둠이 있다면 바로 잘못 포장된 메시지다. 영화 속에서 바넘이 기획한 서커스 쇼는 ‘프릭 쇼(freak show)’다. 기형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만 모아 구경거리로 세우고 묘기를 시키는 서커스다. 영화의 메시지는 세상에서 소외된 이들을 무대로 세워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분위기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들을 자신의 돈벌이에 활용하고 마치 선심을 베풀듯 이제는 그들이 이해된다는 것처럼 바넘을 묘사했다. 이는 소외된 이들을 안아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차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명백한 연출의 실패다.
물론 19세기가 배경이란 점에서 과거의 시대적 특수성을 포함할 순 있으나 21세기에 나온 영화라면 좀 더 세련되고 재해석된 연출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재료는 21세기의 것인데 조리법이 여전히 19세기에 머물러있다.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뮤지컬 영화 <물랑루즈>가 화려한 분위기와 서사의 설득력을 모두 챙겼던 것과 비하면 아쉬움이 큰 부분이다. 참고로 <물랑루즈>는 <위대한 쇼맨>보다 무려 16년 전에 나온 영화다.
현대인들은 영화를 감상하는 수준이 날로 높아지는 영민한 관객임과 동시에 ‘차별’이란 단어에 대해 더 민감해진 세계를 살아가는 성숙한 시민들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 채,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전체를 상쇄하려 한 의도를 지울 수 없어 <위대한 쇼맨>에게 상찬만을 남기기는 힘이 들다.
이쯤에서 <위대한 쇼맨>의 ‘위대한’이란 형용어는 어떤 의미일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새로운 예술을 만들었으니 칭찬받아 마땅한가. 아니면 그 목적을 위해 사용한 잘못된 관념과 수단에 대해 조소를 보내야 하는 것일까. 역시 정답은 없다. 모든 해석의 몫은 관객에게 돌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