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의 사명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의 목적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 말입니다. 삶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또렷하게 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도 종종 생각해 봅니다만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특별한 사명감이나 내 삶의 고유한 가치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결코 단순하지도, 짧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의 현재를 만든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나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생각해 보긴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아가야겠다>가 아닌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돌아보면 인생이라는 바다 위에 띄워진 제 작은 배의 키를 잡고 적극적으로 조종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돛을 올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이리저리 흘러갔습니다. 때가 되어 진학을 하고, 때가 되어 적당한 회사에 취직을 하고, 누구나 그렇듯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사는 삶. 그 사이에서 의사결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현실에 순응하는 대로 살아왔습니다. 말 그대로 수동태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런 제게도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4년 전 어느 날 첫째 아이가 학교에서 방과후 수업으로 했던 캘리그래피 작품집 가져왔습니다. 저는 그 멋진 캘리그래피 글자들에 매료되었습니다. 아이가 가져온 교재를 가지고 혼자서 열심히 그리고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캘리그래피는 딥펜으로 번져갔습니다. 필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많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딥펜을 쓰며 sns를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sns에 푹 빠져 정신없이 운영하는 약 1년 동안 정말 많은 칭찬들을 받았습니다. 잘한다, 예쁘다 등등. 아마도 제가 살아온 모든 날 동안 받은 모든 칭찬보다 많을 것이라 장담합니다. 칭찬이 왜 돌고래를 춤추게 하는지 몸소 깨달았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제 인생을 마감하기 전까지도 그 기록을 깨지 못할 거란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제가 쓴 글씨를 더 예쁘게 꾸미고 싶은 욕심으로 종이에 쓰던 글자를 디지털로 옮겨봤습니다. 세상이 그리 빨리 변한다는데 디지털 세상은 어떨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결국은 디지털 노트와 다이어리, 다꾸 용품을 제작하는 일로 사업자를 내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마침 전직이 웹디자이너였고, 마침 아이들에게 엑셀로 플래너를 만들어 주던 것이 장점이 되었습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일은 욕심으로 확장되었고 칭찬으로 날개를 달아 또 다른 호기심으로 디지털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정표를 정하고 어떻게든 장애물을 넘고 돌파하여 목적지에 도착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그럴 깡도 없고요. 그렇다고 해서 한곳에 정박해 있는 배는 아니었던 겁니다. 바람에만 실려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배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바람이 바뀌는 결마다 돛을 바꿔달고 그때그때의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목적 없이 그저 흘러가는 듯해 못마땅했던 제가 애틋해졌습니다.
이제 저는 압니다. 직업이 두 개, 세 개인 사람들이 넘사벽의 슈퍼맨만은 아니라는 것을요. 그 사람들은 저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이끄는 무언가에 반응을 했을 뿐입니다. 그게 호기심이든 욕심이든, 어쩌면 현실적인 돈이든 말이죠. 무엇이든 그들은 두려움보다 끌림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이재명 대통령의 과거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대략의 내용은 '사회에 공헌을 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의 형태가 정치이진 않았다. 다만 그 자리에서 뭐든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방향으로든 길이 열리고 그 길을 따라 또 열심히 갈 뿐이었다'였습니다. 그 말이 지금은 무슨 뜻인지 압니다. 누군가는 저에게 묻습니다. '디지털 플래너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저는 계기는 캘리그래피라고 말하지만 누구도 캘리그래피와 디지털 플래너의 교집합을 바로 떠올리지 못합니다. 제가 직업이 두, 세개인 사람들에게 느꼈던 것처럼요. 그게 인생이지 않을까요? 어떤 한 꼬투리가 기회가 되고 계기가 되어 나를 이끌고 어디로, 어디까지 데려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현재는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성실한 하루하루가 가져다준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앉아서 책을 보고 필사를 하는 것을 즐겨 합니다. 하루 종일 하고 있어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하는 일도 컴퓨터로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니 하루 중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문제는 움직이는 것을 정말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가장 싫어 하는 것 역시 운동입니다. 하지만 한 해, 두 해 내 몸에 연식을 더해가니 이제는 원하지 않아도 살기 위해 움직여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운동하기 싫어 이리저리 핑계만 대고 있던 참에 마침 저에게 딱 맞는 '슬로 조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슬로 조깅의 효과란 또 얼마나 구구절절이 좋은지 '그래 이 정도면 나도 움직일만하겠다' 싶어서 요즘은 종종 러닝화를 신습니다. 그러고 있으니 남편은 아주 신이 났습니다. 제가 곧 자신과 함께 마라톤이라도 갈 수 있을 것처럼 엉덩이가 들썩들썩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러닝과 트레일러닝에 푹 빠져서 언제고 저와 함께 달리기를 희망하던 참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조금 무섭습니다. 이미 경험한 바로 이 슬로 조깅이 나를 어디까지 데려갈지 모르니까요. 나도 모르게 -벌써 아기자기한 디즈니 메달이나 산리오 메달이 저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무엇엔가 이끌려 어느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지. 제발 운동만큼은 슬로 조깅에서 멈춰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총총 (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