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책 이야기

세상의 중심, 인생의 주체는 바로 '당신'이다.

by 팔구년생곰작가





앞으로 펼쳐질 나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다면? 이번 씽큐온 3번째 책 '운명의 과학'을 읽은 후 신경과학분야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결정론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난 운명이 결정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서평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책을 큐블리케이션 해주신 고영성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또한 고 작가님의 책을 보는 안목에 다시 한번 놀랐다. 신박사님이 고 작가님에게 왜 '알파고'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설렘, 기대, 생소함, 복잡함, 어려움, 분노, 공감, 감동, 연민 등의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책 '운명의 과학'은 일부만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 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다 읽은 후 나는 장거리 마라톤 후에 느끼는 카타르시스와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책의 저자는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저자 '한나 크리츨로우' 박사는 과거 영국의 주요 정신의학 병원에서 간호조무사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신경과학자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책을 읽게 될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솔직히 처음에는 알기 어려웠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그는 얼마만큼 뇌가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운명론적 존재인지, 자유로운 존재인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같다. 또한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 준 '뇌'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느끼며 살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인류의 여명기 이후로 인간은 운명을 지배하는 존재가 누구, 혹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삶의 궤적을 자신이 결정하는지, 아니면 스스로의 통제를 벗어난 운명이 결정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해결해야 할 골치 아픈 수수께끼의 목록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 한나 크리츨로우, 운명의 과학 >


우리는 자유의지와 온전한 의식을 갖추고 있는 주체인가, 아니면 내면 깊숙이 자리 작고 자기도 모르는 구동장치로 움직이는, 미리 프로그램된 기계에 가까운 존재인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인류는 이 질문에 여러 다른 방식으로 대답을 내놓았다. 인간은, 자신이 신의 권능으로 부여받은 영혼에 의해 생명력을 얻은 존재라고 주장했다. 혹은 신에 가까운 지적 능력에 영감을 받아서, 혹은 뇌 속을 어지러이 돌아다니는 신경화학 물질에서 힘을 얻어 생명을 얻은 존재라고도 주장했다.
대답이야 어찌 되었든 애초에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의식 그 자체에 숙고할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발달된 동물이기 때문이다. < 한나 크리츨로우, 운명의 과학 >



자유의지냐 운명이냐

참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운명을 믿지 않는 편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결과로 삶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유의지가 아닌 뇌의 지도에 따라 움직이는 거라면 어떤 기분일까? 아마 내 인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책에서는 자유의지 및 운명에 대해서 어떤 것이 맞고 틀린 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뇌라는 정보처리 시스템에 의해서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뇌의 지도가 점점 더 분명하게 밝혀짐에 따라 자유의지가 차지하는 공간이 실제로 줄어들고 있다면, 그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상상했던 것만큼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위험이 따라온다. 개인의 수준에서 보면, 이런 주장은 마음을 불편하고, 불안정하게 한다. 자신의 행동이 상황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은 자기 권한이 약해져서 사회적 책임감이 결여된 행동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모두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포기한다면 사회에 파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한나 크리츨로우, 운명의 과학 >



연민 그리고 공감에 대해서


나는 현재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연민'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한다.

'연민이라는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연민이라는 감정을 쏟아낼 때가 있다.'


문득, 예전 출근길 버스에서 넘어진 할아버지를 부축해 드린 기억이 났다. 만약 내가 연민이라는 감정이 없었다면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119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을까? 연민이라는 감정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이타적인 행동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책에서는 공감하는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공감이라는 감정이 좋지만 타인의 고통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경우 개인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나는 큰 공감이 되었다. 과거에 나는 연민이라는 감정 없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다 보니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이 따라왔다. 그래서인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연민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되면서 사람들과 원활하게 상호작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무관심보다 공감이 필요하고 공감보다 연민이 중요한 것 같다.


이타적 행동은 공감에서 시작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입장이 되어 보고 그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공감 능력을 대단히 높이 쳐 주지만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카타르시스 없이 타인의 고통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견딜 수 없는 개인적 고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는 능력을 오히려 방해한다. 나는 연민이 공감의 실용적인 버전이라 생각한다. 연민은 그냥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연민에는 실직적으로 도움이 될 무언가를 하고 싶은 강력한 욕구도 포함되어 있다. 연민은 이타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고통에 빠진 타인을 도우면 공감에 따라오는 고통스러운 기분을 진정시킬 수 있다. 이는 공감이 자연스럽게 이타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공감을 경험하는 사람이나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 모두에게 가장 이로운 행동임을 말해준다. < 한나 크리츨로우, 운명의 과학 >



개인적인 이야기


나는 응급센터에서 근무하는 현직 간호사이다. 과거 길가에 쓰러져 있던 오래된 노숙자를 119를 통해서 만난 기억이 있는데, 나이는 대략 30대 후반, 노숙을 하기에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오래된 길거리 노숙으로 인해서 행색이 좋지 못했다. 반대로 과거에는 열정이 넘치며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훈남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미동도 없었다.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연히 대소변을 가릴 턱이 없었다. 마음 한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삶이 힘들었으면 모든 것을 놔버리고 노숙을 선택했을까.?'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신경과학이라는 분야의 연구가 활발해지고 발전한다면 먼 훗날 이러한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뇌의 지도에 따라 우리의 운명도 어느 정도 결정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아울러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불편한 감정도 함께 동반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뇌'에 대한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뇌'라는 정보처리 시스템에 축적되어 있는 데이터에 따라서 여러 상황과 선택에 적절하게 반응하지만 결과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닐까? 따라서 세상의 중심, 그리고 삶의 주체가 바로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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