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당신이 읽어봐야 할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
10여 년 전 어려워진 집안 환경으로 인해 나는 어른이 되기도 전부터 수 없이 많은 일들을 접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둘 무렵에는 경기도에 위치한 중견 기업에 현장실습생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내가 그때 수능 준비를 하지 않고 현장실습생으로 취업을 결심한 까닭은 어려운 집안을 돕겠다는 생각보다 부모님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집을 벗어나면 조금 더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집에서 멀리 떠나온 낯선 곳에서 마저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거기서도 어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지독한 편견과 간섭이 있었다. 더불어 어린 나이의 실습생 신분이었지만 회사의 노동력의 일부였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이 주어졌다.
철없는 자유를 꿈꾸던 그때 나는 일을 하면서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바로 노동의 본질 그리고 노동과 관련된 불편한 진실에 관해서였다.
회사의 산업 라인에 하나의 부품이 된 사람들은 산재를 당하고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도 몇 천만 원의 위로금이 전부였다. 회사의 진정한 사과와 인사도 없었고, 재발 방지 또한 없었다.
대기업의 살인적인 주문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 매일 야간 잔업은 기본이고 직원들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야 했다. 한 달을 일하면 보름은 야간근무를 뛰었고, 나머지 보름은 주간 근무를 서야 했다. 왜 그렇게 일을 했냐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윗사람에게 묻고 따질 새도 없이 하라면 해야 했다. 그저 시키는 일만 해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과로로 인한 코피를 쏟기도 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친해진 동료와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가동을 하지 않고 폐쇄된 을씨년스러웠던 공장의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과거에는 활기 넘치게 산업라인이 돌아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하루에도 몇 번씩 멈추는 낡고 오래된 승강기였다. 직원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지만 회장과 사장 그리고 이사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부서장들은 이런 문제를 입밖에도 꺼내지 못했다.
결국 열심히 일하던 직원 한 명이 사고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건물은 폐쇄되었고 누구 하나 거기를 가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또한 어떤 직원은 얇은 라텍스 글러브와 면 마스크를 착용한 채 유해물질을 만지며 잔업을 해야 했다. 불량으로 찍어진 LCD판을 닦아내는 일이었다.
결국 평생 불임이라는 판정을 받아야 했고, 다른 이는 백혈병이라는 불치병을 앓아야 했다. 하지만 누구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고, 사과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공장에 들어온 것이 잘못이었다. 철저하게 무시를 당하면서도 가장이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못 배웠기 때문에 참아야 했고 감당할 수 없는 많은 빛을 지고 있기 때문에 일을 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다른 선진국의 노동자들이 받는 당연한 권리란 없었다. 인권이라는 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하라는 일만 해야 했고, 어떤 불만과 불평도 꺼낼 수가 없었다.
A라인의 부서장은 지방의 4년제 대학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승진이 빨랐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역시 대한민국에서 성공하려면 대학을 나오고 봐야 된다. 그때부터 나는 악착같이 공부하고 준비해서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이런 지옥 같은 곳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떠나야 했다. 더 좋은 곳으로 더 나은 곳으로 떠나야 했다. 이를 악물고 악착 같이 공부하고 준비하였다. 그렇게 나는 설계 엔지니어를 꿈꾸고 있었지만 누나의 권유로 인해 그 당시 전망이 밝다고 한 간호사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래도 간호사가 되면 병원에서 일하니까 공장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간호사 한 명이 담당하는 환자의 수는 많았고, 한 듀티에 소화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의 일과 처방이 쏟아졌다. 또한 법적으로 명시된 의료인이 아닌 다른 이의 낯선 손길이 환자의 치료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생각했던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불합리에 맞설 힘이 없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고, 병원의 업무를 알아가고 있는 신규간호사일 뿐이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어느새 나는 임상에서 9년 차가 넘어가는 간호사가 되었다. 이제는 급성기의료기관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꿈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왜 갑자기 누가 바라지도 않던.. 읽기에도 귀찮고 불편할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무너져 가는 공공의료를 막기 위해서 차가운 바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당한 전출로 인해 세상을 등진 철도 노조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임금 노동에 내몰린 현장실습생들이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인해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조직이 싫으면 그만두라고 한다. 자유를 찾아서 떠나라고 한다.
또 다른 누구는 불법 파업이라고 한다.
공공의료를 지켜내기 위한 사람들의 외침에 귀를 막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국민 소득은 현재 3만 달러에 이른다. 이제는 모든 구성원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
불공정에 맞서 현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희가 바라는 건 저희를 좀 봐달라는 겁니다.
저희의 이야기를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
< 영화 '카트' 대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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