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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Mar 13. 2023

사랑할 결심

소파 말고 침대


독립 4개월차가 되어서야 허전했던 공간에 작은 2인용 이케아 소파를 들여다 놨다. 달에 한 번은 이케아에 가서 정말 편한 지 앉아보며 눈독들였던 소파. 혼자 소파 조립까지 마치고 머릿속에 그린 대로 가구 배치를 하고 나니 비로소 집이 완성되었다고 느꼈다. 2인용 소파인지라 누워서 다리를 쭉 뻗으면 팔걸이에는 무릎 뒷부분이 겨우 닿아있고, 쪼그려 누우면 구겨져 있는 기분이 들지만 침대가 아닌 진정한 휴식의 공간을 만들었음에 행복했다.


'그래, 나는 소파 없이는 못 사는 인간이었어!'


엄마랑 같이 살 때는, 그니까 비교적 큰 집의 4인용 소파에서 잠드는 건 감기에 걸리지 않는 한 별 문제가 아니었다.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다 잠드는 건 일종의 작은 일탈이기도 했다. 나는 언제나 소파에서 잠드는 것을 좋아해 왔다. 하지만 내 집의 소파는 온전한 휴식을 누리기엔 작은 사이즈. 귀가 후 잠깐 쉰다고 누웠다가 새벽 서너시쯤 소파에서 눈을 뜨면, 그제서야 저린 다리를 두들기다 겨우 침대로 옮겨 갔다. 침대로 이동할 기력이 전혀 없을 때는 눈앞에 보이는 침대를 포기한채 다리를 그대로 구기고 옆으로 누워 완전한 아침을 맞곤 했다. 원룸의 작은 소파에서 날밤을 보내는 것은 다음 날의 피로를 가중시키는 원흉. 한 번에 제대로 잠자리에 들면 좋으련만. 회사와 대학원 과정을 병행하면서 체력을 소진하던 나는 점점 굳어져가는 습관을 고칠 여력이 없었다. 소파에서 잠드는 나를 안타까워하는 친구들의 잔소리도 나를 침대로 보내기엔 부족했다.


그런 나를 소파에서 일으켜 침대로 보내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


예전에 좋은 호텔에서 프로포즈를 받은 날. 내게 비밀로 하고 프로포즈 준비를 하느라 인천과 서울을 두 번이나 왕복해서 극도로 피곤해했던 그를 먼저 침대에 재운 나는 소파에 누워서 혼자 티비를 보다 그대로 잠들었다. 눈을 떠 보니 해가 환히 들이치는 아침이었다. 아니, 나 저 좋은 침대를 두고 지금 혼자 소파에서 잔 거야? 내가 가져온 기억이 없는데 내 위에 덮인 담요를 보며 날 침대로 이끌지 않았던 그를 참 야속해했다. 소파에서 자고 있으면 깨워서 침대 가서 자라고 해야지, 담요만 덮어주고 혼자서만 자면 어떡하냐고 서운하고도 황당함에 입을 삐죽였다. 그는 내 투정에 당황해하며 '소파에서 자는 거 좋아하잖아'라는 답을 내놓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저 좋은 침구를 두고 그건 아니지!' 잔소리를 퍼붓고 한 시간이라도 눕겠다며 침대로 갔던 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가 절대로 소파에서 잠들지 못하게 한다. 소파에 누워서 전화하고 있냐고 물어보고 말로라도 달래서 나를 일으켜 세운다. 내가 시간을 쪼개어 수업을 듣고, 논문을 준비하며 매일 일찍 잠들지 못하는 것을 경이롭게 여기면서도 안쓰럽게 생각해줬다. 나를 잘 재우는 게 자신의 목표라고 했다.


나를 데려다주러 왔다가, 날 재워주겠다며 집에 들어왔던 밤. 손님을 그냥 맞이할 수는 없어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셨다. 겨울날 긴 데이트 끝의 맥주 한 캔과 집에 있다는 편안함 때문이었는지 긴장 대신 졸음이 쏟아졌다. 졸린 기색을 보이자마자 그는 나를 떠밀어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아 침대에는 씻고 누워야 하는데’ 생각만 할 뿐 눈도 못뜨고 외출복 차림 그대로 침대에 누운 내게 그는 침대맡 조명을 어떻게 끄냐고 물어봤다. 불 끌 생각부터 하는 거냐고 장난스레 반문했지만 나는 그가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정신없이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문득 눈을 떠보니 그는 조용히 홀로 집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벌떡 일어났지만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집을 나서려는 그를 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사랑해.”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숨쉬듯이 나온 말이었다. 들은 사람보다 말한 내가 더 놀랐다. 아주 오랫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던 말인데. 이 사람에게 이렇게 빨리 말하게 될 거라고 상상한 적 없었는데. 나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타입도 아니고,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도 아닌데. 무척이나 당황해하는 날 보며 그는 싱긋 웃더니 고맙다고 했다.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배웅을 극도로 말리던 그에게 못이기는 척 문 앞에서 인사하고 제대로 씻고 침대에 누워서야 깨달았다. 조명을 어떻게 끄냐고 물어본 건... 나 잠들면 꺼주고 가려고 했구나. 그는 내가 소파에서 잠들어도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놔뒀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든 편히 쉬게 하고 싶어 애쓴다. 멀리 목소리로라도 나를 달래고 어르고 위해서 평안한 휴식을 취하도록 해준다. 나를 기어코 소파에서 일으켜 침대로 보내어 토닥여준 그건 전부 다 사랑이었다. 잘 자라고 만져주던 머리카락에서부터 얕은 잠에 우스꽝스럽게 움찔거렸을 내 발가락까지, 잠이 잔뜩 묻은 이 집에는 사랑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사랑을 들이마셨기에 사랑을 내뱉었을 뿐이었다. 늘 말해왔던 것처럼 그저 나를 잘 재우고 가려고 했을 뿐이었던 그 밤. 자연스럽게 숨을 쉬는 것처럼 ‘사랑해’를 말했던 그 밤. 나는 불안을 내려놓고 그를 마음껏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최근 회사와 논문 준비로 번아웃이 와서 매일 밤 소파에 누웠다가 구겨져 잠들고 해 뜰 때서야 침대로 기어가는 몹쓸 생활을 했다.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스스로 한심해하다 문득 이 글이 떠올랐다. 이 글이라기보단 전 연인이 떠올랐던 거겠지만. 아무튼 이건 일 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땐 매일 받는 사랑에 겨웠는지 글을 시작하고도 마무리를 못했나보다. 웃긴 건 내가 잘 잤으면 좋겠다고 하며 내 마음을 가져간 그는 불면증이 심각한 사람이었다. 자는 시간이 적을 뿐이지 잘 자는 것도 나였고, 잘 자길 바란 건 내 쪽이었다. 불면증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중요한 이별 사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의 숙면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으며 내 사랑의 무력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순간 마지막 포옹 속에서 내가 했던 말도 ‘꼭 병원 가. 잠 좀 잘 자’였고 그는 누굴 환자로 아냐고 웃었는데. 바보. 너의 숙면을 신경쓰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도 여기서 언제나 네가 잘 자고 있길 바라고 있어. 나는 그 벅찬 마음을 글로 남겨둔 덕에 소파를 떠나 침대로 간다. 고마워. 그 때 그 마음은 잘 간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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