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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Feb 14. 2024

잠만 자고 갈게요

소파 말고 침대 2

재워달라고 했던가. 황당하고 당황했지만 오래 봐 온 한참 어린 애라 그런가 전혀 위협이 될 것 같진 않아서 그러라고 했다. 왜 그런지는 안 물어봤다. 그냥 그 나이에는 집에 가기 싫을 때가 있으니까 그런가보다 했다. 대신 소파에서 자라고.


무방비로 생각치도 못한 손님을 맞은 정돈되지 않은 집. 개지 못한 빨래는 대충 쑤셔 넣고 널부러진 책은 그대로. 책장에 꽂힌 책들에 대한 얘기들을 조금 나누다 학교에 가야 한다는 꼰대같은 소리도 하다 칫솔을 달란 소리에 새 칫솔을 찾아주었다. 깜깜해서 다행이다. 집 진짜 난장판인데.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발 씻고 자라고 난리를 쳤다길래 걔는 발도 씻고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나는 착한걸까? 짜증나게도 애가 불편하게 잘 게 신경쓰여서 바꾸자고 했다. 그 애를 침대로 보내고 나는 소파에 누웠다. 감사 인사를 건네더니 나보고 3분 안에 잠들지 않으면 본인의 코고는 소리때문에 힘들거라고 했다. 알겠다고 대답했을까. 이내 잠들어버렸는지 눈을 뜨니 어느새 해가 떠 있었고 그 애는 내 침대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침대 창가에 있어서 추울텐데 소파에서 잔다고 이불을 가져와 버린 내가 조금 이기적이었나 싶어서 이불을 둘러주고 담요를 가져와 다시 소파에 누웠다. 그게 아침 아홉 시. 이게 지금 무슨 일일까, 고민하다 커지는 코골이에 다시 잠들었다. 원래는 월요일이었기에 수 차례 울리던 알람들을 힘겹게 끄고나니 다시 열시 반 쯤. 얼굴도 안보이게 누워있었지만 뒤척이는 소리에 말을 걸었다.


- 너 집에 언제 가냐? 열시 넘었어. 외박하는데 부모님이 걱정 안하시니?

- 괜찮아요. 조금만 더 잘게요. 한 시까지만.


눈을 떠보니 한 시. 블라인드를 채 다 내리지 않았기에 햇살이 방으로 들이쳤다. 어둠에 가려졌던 먼지도 다 보이겠군. 부끄럽네 정말.


- 이야 채광이 좋네요.

- 일어났음 얼른 가라.


말만 하고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애를 두고 거울로 내 몰골 구경을 했다. 전날 모자 쓰고 운동하고 술 마시고 놀다 세수만 겨우 하고 잤는데 아휴 참. 얘한테 잘 보일 생각은 없다만 적나라한 모습을 보일 생각에 인간적으로 민망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씻을 수도 없고. 일어나 앉아 눈을 좀 부비던 아이는 벗어두었던 양말을 찾아 소파로 와 앉았다. 물을 마시고 양말을 신는 사이 나는 안 마주치려는 속셈으로 침대 이불 속에 쏙 누워버렸다.


- 용케 소파에서 잤네요? 누나 덕에 편하게 잤습니다. 이불 언제 바꿔줬대요.

- 고마운줄 알아.


소파에서 일어나 옷을 챙기길래 나 역시 일어났다. 대강 이불 정리를 하는 사이 튀어나온 내 강아지 인형을 보고 이런 게 침대에 있었는지 몰랐다며 놀라는 그 애한테 내가 더 놀랐다. 창가에 세워둔 만년 달력 오브제를 보고 놀라는 애한테 더 놀라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냥 널어둔 가수 포스터도 너는 다 봤겠네. 나 그거 진짜 좋아 죽겠어서 붙인게 아니라 재미로 붙인건데. 모르겠다. 나의 민낯보다는 나의 생활 공간을 들켜버린 게 굉장히 부끄러웠던 것 같다. 부끄럽다. 인스타그램에 멋있는 척은 다 했는데.


- 보지마, 보지마.

- 네, 안하고 쌓아둔 설거지도 보고요. 중장기 심층연구도 보고 가네요.


이도 안닦고 가냐니까 입 다물고 집에 갈거라 괜찮단다. 현관에 서서 신발을 다 신더니 갑자기 머쓱하게 웃으며 큰절을 올리는 시늉을 했다.


- 새해 복 많이 받...


나는 현관에 서서 말을 끊고 빨리 나가라고 재촉했다.





그냥 아는 동생. 어쩌면 그저 한참 어릴 뿐인 친구. 우리는 그 많은 밤 같이 술을 마시면서도 그저 친구였다. 술에 흐트러질지언정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 못된 습관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재워달란 말에 이상하긴 했어도 걱정은 안됐던 걸까. 나는 널 왜 집에 들였을까. 아침에 양치도 안하고 나갈거면 자기 전에도 하지 말지. 한 번 쓰고 만 칫솔이건만 당연한 듯 내 칫솔꽂이에 꽂혀있는 또 하나의 칫솔이 거슬린다. 밤에는 어두워서, 아침에는 안경을 쓰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건만 내 침대에 누워 내 이불에 파묻혀 자고 있던 실루엣이 생각나 거슬린다. 내 소파에 앉아서 생수통채 벌컥 물을 들이키며 입 대고 마신 게 아니라고 웅얼대던 네가 생각나 거슬린다. 너는 무슨 생각으로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아닌가? 아니지. 나는 왜 네가 남기고 간 그 작은 흔적들에 신경이 쓰이는 걸까. 나는 왜 그렇게 네가 불쑥 나를 흔들고 갈 거라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 때의 재밌는 추억으로 묻고 넘어가려 하지만 발칙했던 제안에 넘어갔던 내가 너무 바보같아서 이리저리 뒤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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