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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Aug 23. 2018

#1. 건전한 지서, 요망한 요서

내가 만드는 책이 누군가에게 지서이자 요서가 되길 희망한다

“17년 동안 일주일 넘게 쉬어본 적이 없어.” 그 말 한마디로 난 그를 더 이상 잡을 수 없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직장에선 부서장으로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무거운 삶을 살았다. 이제 그 무게를 조금은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흉중에 담은 것이다. 그렇게 그가 내뱉은 말은 위력과 무게가 대단했다. 그리고 그는 11년간 몸담고 있던 직장을 떠났다. 

그가 있던 자리는 자연스럽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과정을 거쳐 내가 앉게 됐다. <모터 트렌드> 사무실이 한눈에 보이고 에디터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눈에 담기는 자리다. 지난 십수 년 동안 벽이나 창을 보고 앉았던 내게 앞이 뻥 뚫리고 내 키보다 훨씬 높은 책장이 있는 자리는 앉은 지 한 달이 다 돼도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낯설고 불편하다. 

낯섦의 자리는 순식간에 많은 걸 바꿔놓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떤 기사를 어떻게 생산할지 (가끔) 고민했다. 물론 하루 중 가장 큰 고민은 ‘점심으로 뭘 먹을까, 오늘 저녁은 누구하고 술을 마실까’였다. 지금은 <모터 트렌드>를 어떻게 꾸리고 이끌며 만들어나갈지 생각한다. 갑자기 앉게 된 자리여서, 사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민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하는 고민이 맞나 싶을 때도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고, 혹여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고민을 준비하기 위해 고민하는 성향도 아니다.

‘자동차 전문지로서의 역량을 강화하면서 재미있는 잡지를 만들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은 이게 점심 메뉴보다 더 큰 고민거리다. 페이지를 잘게 쪼개며 글과 그림, 디자인을 나누고 구분해 머릿속에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하지만, 당장은 뾰족한 묘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이 낯섦의 자리에 있는 동안 이 고민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두 명의 <모터 트렌드> 전임 편집장들도 이런 고민 속에서 매일을 보냈을지 모르겠다. 

업무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은 회의가 많아졌다. 주간회의, 월간회의를 준비하고 신사업과 성장 동력 등에 관한 내용으로 경영진 및 타 부서와 회의한다. 회의는 한 달에 한 번 하는 기획회의가 전부였는데 이 자리에 앉으니 회의가 수시로 열린다. 뚜렷한 결론이나 흡족한 결과가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듯 보인다. 

기사를 쓰는 양이 약간 줄었다. 그런데 약간의 사이를 편집장 업무가 치고 들어왔다. 기사 배열표를 수십 번씩 수정하며 기사를 앞뒤로 재배치하고 페이지를 줄이거나 늘리며 엑셀과 씨름한다. 보통 배열표는 마감 막바지에 만든다. 매달 광고 페이지가 들쑥날쑥하거니와 기사가 펑크 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런데 난 기획회의 다음 날 바로 배열표를 만들었다. “이달은 이대로 할 거야. 절대 기사 빵구 나면 안 돼.” 70퍼센트 진심에 여지 30퍼센트를 담은 엄포다. 여지를 둔 이유는 엄포를 놔도 에디터 중 누군가 기사를 펑크 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고, 그 불안감이 마감 막바지에 터져 초짜 편집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아달라는 70퍼센트 진심의 엄중한 경고다. 여지 30퍼센트는 아무도 모르게 스페어 기사도 두어 개 만들어 대비했다.

그렇게 여러 회의와 배열표, 펑크의 불안감과 씨름하는 사이 마감이 다가왔다. 노란빛 가득한(형광등이 노란색이다) 사무실에 키보드 누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시간이다. 에디터들이 밤을 낮처럼 지새우며 콘텐츠를 생산한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다. 웃음기 없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저 기계처럼 뇌를 8000rpm으로 돌리며 무언가를 만든다. 지난 십수 년 동안 경험한 익숙한 모습이자 시간이다. 

우리는 왜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를 지극히 익숙하고 평범하게 받아들일까? 야근이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비정상적인 거 아닌가? 7월 1일부터 노동시간 단축을 골자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적용되지만, 직원이 300명이 되지 않아 2020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야근과 주말 근무라는 비정상적인 평범함 속에 있는 에디터들을 보면서, 근 한 달간 <모터 트렌드>를 잘 만들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그 어려운 고민이 떠올랐다. 

나는 <모터 트렌드> 편집장으로서 <모터 트렌드>의 허를 채우고 살을 찌우는 첫 번째 처방전을 에디터에게 내리기로 했다. 에디터들은 지난 한 달 동안 <모터 트렌드> 역사상 가장 적은 인원으로 책을 만들었다. 해외 출장도 있고 부산모터쇼라는 큰 행사도 있어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며 일했다. 얼굴이 노랗게 뜨고(노란색 형광등 때문만은 아니다) 등이 굽고 말수가 적어졌다. 육체적, 정신적 노동의 강도가 어느 때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처방전이라고는 했지만 지금의 <모터 트렌드>가 아프다는 건 절대 아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에디터들이 자기 몫의 120퍼센트 이상을 해주고 있다. 그렇게 <모터 트렌드>는 예나 지금이나 단단하다. 다만 인간은 늘 120퍼센트로 일할 수 없다. 100퍼센트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도 힘들다. 때로는 70~80퍼센트만 하며 고갈된 에너지를 비축하면서 일해야 한다. 

“우리 매일 오후 3~4시를 넷플릭스 보는 시간으로 할까?” 진담 30퍼센트에 의지, 희망 등 추상명사가 뒤섞인 농담 70퍼센트다. 진담보다 농담 퍼센티지가 더 높은 이유는 <모터 트렌드> 편집장에겐 이런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간을 확보하려면 뚜렷한 명분이 있어야 하고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회의와 설득이 필요하다. “앞으로 야근 금지령을 내릴 거야.” 이건 진심이 대부분이다. 그러자 류민이 말했다. “그러면 집에서 야근해야 해요. 그냥 회사에서 하는 게 나아요.” 진심으로 말했지만 나도 확신은 없었다. 지금도 일요일에 출근해 오후 8시에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부터라도 야근과 주말 근무를 줄여야겠다. 

넷플릭스 시청 시간과 야근 금지령은 의지를 담은 농담이었다. 다행히 에디터들이 박장대소는 아니어도 실소 비슷한 웃음은 던져줬다. 그렇게 에디터들이 한 번이라도 더 웃고 즐겁게 일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내가 준비할 첫 번째 처방전이다. 근로자 복지와 처우 개선 등 선거철에 나오는 문구들은 내 능력 밖이다. 일의 강도를 조금이나마 줄이고 즐겁게 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다. 책을 만드는 이들이 유쾌하고 즐겁게 일해야 책에도 그 기운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재미있는 책이 될 테니까. 

갑자기 찾아온 낯선 부담 때문에 여러 고민과 걱정으로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다.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깊은 무력감 같은 것에 빠지진 않았다. 물론 한 달도 안 돼 그런 무력감을 느꼈다면 그게 더 큰 문제겠지만. 앞으로 <모터 트렌드>가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현시대의 흐름에 맞춰 디지털 콘텐츠를 강화한다. 종이는 지금보다 다양하고 참신한 콘텐츠를 더 많이 담게 된다. 그렇게 <모터 트렌드>는 자동차 전문지로서 건전한 지서(知書)이면서, 동시에 요망과 잔망으로 독자를 미소 짓게 하는 요서(妖書)가 될 것이다. “왜 한 번에 변화하지 않느냐?” 묻는다면, 나에게도 그리고 <모터 트렌드>에도 적응과 변화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애써 손을 비벼본다. 꾸준히 지켜봐주시기 바란다.

편집장 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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