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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May 10. 2021

#32. 우린 살아남았다

어쩌면 우린 전쟁보다 참혹한 삶의 한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비루한 몸뚱이를 일으킨다. 불면증 때문에 늦게 잠든 탓에 눈꺼풀이 무겁다. 알람으로 맞춰놓은 라디오에선 미국 대선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새 대통령이 선출됐는데, 현직 대통령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소송을 제기한단다. 과학문명이 가장 발달하고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지구의 경찰 노릇을 하는 선진국인데, 투표 방식과 후보자들의 선거운동 과정 그리고 낙선인의 대응 자세를 보면 후진국도 이런 후진국이 없다. 더욱이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도 가장 많은 나라 아닌가. 

샤워를 하고 옷을 입는다. 라디오를 끄고 인터넷 모뎀과 공유기 플러그도 뽑는다. 가스밸브는 잠갔는지, 창문은 닫았는지 확인한 후 신발을 신는다. 현관문을 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문이 열리면 다시 집으로 들어간다. 마스크를 안 했기 때문이다. 거의 1년이 다 돼가는데도 마스크를 깜빡하는 경우가 많다. 신발을 벗고 어제 썼던 마스크가 어디 있는지 찾는다.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새 마스크를 뜯는다. 개당 1000원 정도인 마스크는 포장을 뜯을 때마다 아깝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10만원의 과태료를 내야 한다는 방침이 발표됐다.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할 거면 국가에서 마스크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왜 이 나라는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의무와 책임은 커지고 세금이 무거워지느냐며 속으로 욕한다.  

차에 타고 마스크를 벗는다. 도어포켓에 쓰던 마스크 3개가 있다. 오늘 개봉한 새 마스크까지 4개가 됐다. 아마도 마스크는 계속 늘어날 것 같다. 시동을 거니 라디오에서 바이러스 확진자가 200명을 넘었다고 한다. 확진자가 점점 느는 것 같아 불안하다. ‘그러게 핼러윈이 뭐라고 낯짝에 피칠갑하고 나다니고 지랄이냐’며 욕을 내뿜는다. 핼러윈이 코로나 확산의 원인이라는 뉴스는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차 안에서 일갈하니 조금은 후련하다.

언제나 그렇듯 출근 시간엔 차가 많다. 그런데 요즘 더 막히는 것 같다. 감염을 우려한 시민이 자차를 이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특히 최근엔 코로나19 때문에 휘발유값이 계속 떨어지면서 자차 이용 인구가 많아졌을 것이다. 

회사 지하주차장에 도착해 시동을 끄고 가방을 챙긴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후 다시 차로 가 마스크를 챙긴다. 오늘 뜯은 새 마스크가 어떤 건지 몰라 손에 잡히는 걸 쓴다. 엘리베이터가 떠났다. 속으로 욕을 삼킨다. 

세상에 없던 역병으로 많은 이들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가혹한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웬만한 전쟁보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신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 있다. 어쩌면 우린 전쟁보다 참혹한 삶의 한가운데 있을지 모른다. 

혹독한 상황에서 살아남았지만, 우린 자신과 가족, 친구, 동료의 안위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고 있다. 역병에는 절대 항거할 수 없고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가 얼굴을 가리는 것뿐이라는 것도 화가 난다. 

<모터트렌드>는 매년 12월 한 해를 되짚어보는 ‘기억하라’ 꼭지를 기획한다. 올해는 예상대로 코로나19가 모든 이슈를 덮었다. 매년 다사다난했고 올해도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지만, 코로나19가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인류의 기억을 지웠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이 순간 모든 사고(思考)의 행방이 묘연할 정도다. 오늘 하루만 해도 코로나19가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던가. 

누군가는 병에 걸리고 또 누군가는 목숨을 잃는다. 다행히 감염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생업을 잃은 이가 부지기수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이도 많다. 매년 이맘때면 내년엔 어떤 일이 펼쳐질지 기대했었는데, 올해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크다. 부디 내년 ‘기억하라’ 꼭지에선 ‘코로나’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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