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점점 쓸모없어지는 건 당연하다
인류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를 만들었다. 석유를 태우면서 발생하는 폭발 에너지를 동력으로 바퀴를 굴려 이동을 시작했다. 이후 자동차는 새로운 기술을 더하면서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 가게 됐다. 물론 부수적으로 더 편하고 안전한 이동을 위해 여러 기술도 추가됐다. 그렇게 인류는 자동차를 타고 더 넓은 곳을 여행하며 문명을 전파하고 발전시켰다.
자동차가 태동하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지금까지 온 배경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엔진이다. 그리고 엔진은 수많은 부품 중에서 가장 크게 발전한 기술이기도 하다. 예전엔 엄청나게 석유를 태웠음에도 얼마 가지 못했고 엔진이 너무 커 차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아주 작고 가벼워졌다(물론 지금도 자동차에서 가장 무거운 부품이다). 더불어 연료 효율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문제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엔진 효율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석유를 태워서 만드는 에너지의 40%밖에 활용하지 못하고 60%는 공기 중으로 날려버리며 환경문제를 야기한다. 인류를 위한 엔진이 인류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인류는 엔진 없는 차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엔진 대신 전기를 선택했다. 자동차마다 기름을 태우는 방법이 아니라 누군가 생산한 전기를 공급받아 모터를 돌리는 방법이다. 배기가스가 없으니 환경문제로부터 자유롭고 차마다 수천 C°의 온도로 불을 뿜는 엔진이 없어졌으니 더 안전해졌다.
그렇다면 전기차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무엇일까? 바로 배터리다. 내연기관 시대는 각 차가 스스로 동력을 만들었지만, 전기차는 외부에서 생산된 동력을 배터리에 저장해 모터를 돌려 바퀴를 굴린다.
내연기관 시대엔 모든 자동차 제조사가 엔진을 자체 개발하고 생산했다. 엔진을 만들지 못하는 회사는 소리 소문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즉 자동차 제조사에게 엔진은 지속 가능성이었기에 가장 많은 연구개발비를 투입했다. 그런데 전기차 시대는 반대다. 자동차 제조사가 전기차에서 가장 중요한 배터리를 생산하지 않는다. 모두 배터리 제조사로부터 납품받는다. 미래 지속 가능성이 배터리에 있는데 이걸 모두 납품받는 건 미래 자동차 시장의 주도권이 자동차회사에서 배터리 제조사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또 하나의 변화도 예상할 수 있다. 지금 전기차에 들어가는 배터리는 한·중·일 삼국에서 94%나 생산된다. 내연기관의 태동과 기술적 우위는 절대적으로 미국과 유럽에 있었지만, 미래 전기차 시대의 주도권은 완벽하게 아시아가 점유하게 될 거란 뜻이다.
<모터트렌드>는 이달에 배터리에 대한 심층적인 이야기를 다뤘다. 누구나 다 아는 배터리 관련 내용이 아닌, 자동차 배터리의 현재 흐름과 미래 권력에 관한 이야기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미래 자동차 시장의 패권은 배터리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엔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엔진은 그 자체가 자동차의 역사이자 시장의 권력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엔진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는 걸 보고 있다. 이미 여러 자동차 제조사들은 엔진 개발비를 대폭 삭감하거나 없애고 전기차와 자율주행 기술에 전념하고 있다. 한때 가장 중요했던 부품 또는 인력이라도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점점 쓸모없어지는 건 당연하다. 누군가에겐 슬프고 아픈 말이지만, 점점 쓸모없어지는 건 빠르게 손절매하고 시대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할 때가 있다. 과거의 영광에만 사무쳐 당연한 것을 당연시하지 않으면 더 많은 이가 아픔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