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도 LP처럼 역주행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예전엔 지하철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스포츠신문의 전성시대로 당시 500원짜리 신문은 꽤 두툼했고 많은 정보와 광고가 실렸었다. 플랫폼마다 홍익회에서 운영하는 신문가판대가 두세 개씩 있었고, 객실 안에서 신문을 팔기도 했다. 스포츠신문은 지하철을 비롯해 기차, 버스 등 많은 이동수단에서 무료함을 달래주는 최고의 엔터테인먼트였다. 긴 여행을 갈 때면 스포츠신문 2~3개를 사서 일행과 돌려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지하철에서 스포츠신문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무가지라는 신문물의 출몰은 기존의 신문지 생태계를 완전히 뒤집었다. 지하철 엔터테인먼트의 절대적 패권을 쥐고 있던 스포츠신문은 공짜의 파격에 맥없이 무너졌다.
신문을 무너뜨린 무가지의 공세는 드셌다.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어떻게든 출퇴근러의 손에 자사의 무가지를 쥐여주기 위해 머리를 조아리며 신문지를 내밀었다.
그런데 스포츠신문을 맥없이 무너뜨린 무가지의 아성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무가지가 신문지 생태계를 뒤엎었다면, 세상을 뒤집어놓은 절대적 문명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종이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스마트폰의 끝없는 확장성은 종이 인쇄물들이 멸망을 걱정하게 했다. 그러한 심려는 곧 현실이 됐다. 무가지는 종적을 감췄다. 대형 신문사들은 아예 방송사를 차리거나 신문지 대신 인터넷으로 기사를 송출하는 방법을 택했다.
종이 인쇄물은 세상 모든 문명을 손안에서 펼쳐 보이는 스마트폰을 이길 순 없다. <모터트렌드>도 스마트폰의 득세 이후 판매량이 줄었다(모든 잡지가 그렇다). 그 줄어든 만큼의 수익은 온라인으로 콘텐츠를 판매하고 광고를 수주한다. 영상 제작으로도 수익을 내고 있으니 새로운 디지털 문명으로 또 다른 수익구조가 창출된 셈이다.
그렇다면 종이책은 어떨까? 사람들은 이제 이동 중 신문이나 잡지 등의 종이 인쇄물을 보지 않는다. 책을 읽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과거엔 책을 들고 다니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젠 책을 휴대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교과서나 참고서도 태블릿으로 대체되는 마당인데, 누가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닐까. 이제 독서는 책상에서 예쁜 조명과 그윽한 음악 속에서 마주하는 고상한 취미이자 문화다.
어쩌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보는 대신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판독하는 것이 특별한 가치를 흡수하는 자기만족적 행위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책을 만드는 우리는 독자들의 충족감을 더욱 고취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모터트렌드>는 이달부터 책 사이즈를 키우기로 결정했다(자동차 전문지 중에서 가장 크다). 어차피 들고 다닐 게 아니라면 크고 무거워도 된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활자를 키워 가독성을 높이고 스마트폰보다 훨씬 큰 이미지를 담을 수 있게 됐다.
이제 종이 잡지는 절대다수에게 제공되는 보편적 정보가 아닌, 특정 소수만 누리는 특별한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물론 판형을 키우는 것이 특별한 가치를 위한 절대적 방법은 아니다. 다만 디지털 문명 안에서도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읽는 걸 좋아하고, 손에 닿는 종이 질감과 코에 닿는 종이 냄새를 사랑하는 독자를 위해 <모터트렌드>가 조금이나마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지금은 없어진 LP나 카세트테이프처럼 디지털 문명이 인류 안에 깊게 파고들수록 종이 활자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한데 소수이기는 하지만 LP와 카세트테이프는 지금도 유통되고 소비된다. 알코올로 정성스럽게 닦은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 진공관 스피커로 음악을 듣는 행위를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이는 없다. 오히려 고상하고 고급스러운 취미로 보인다. 그리고 이 고급스러운 취미는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2016년 28만 장이던 국내 LP 판매량은 2018년 51만 장, 2019년 60만 장으로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에선 지난해 LP가 CD보다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힙합 뮤지션이 음원을 모아 LP로 음반을 제작하는 건 과거 문화에 대한 존귀와 그 문화를 선호하는 이들을 위한 배려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본질은 수익이다.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가치를 문화라는 코드에 담아 음원보다 더 비싼 값에 판매하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됐고, 그 시장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잡지도 그 누군가에겐 여전히 특별하고 소중한 경험이자 취미이다. 디지털화가 깊게 파고들수록 종이 잡지도 LP처럼 더욱 특별하고 고상한 문화로 여겨지며 새로운 시장을 형성할지도 모른다. 물론 잡지쟁이의 희망 고문일 수도 있다.
편집장 이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