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깨끗한 지면에 신생 문명을 기록했으면 한다
현존하는 세상 모든 자동차 미디어는 엔진의 역사와 함께했다. 자동차가 세상에 나왔던 그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동차 미디어는 모든 순간을 문자, 사진, 영상으로 기록했다. 새로운 이동 문명과 거기서 파생된 신생 문화를 세상에 전파하고 설파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신문이나 방송 등 대중매체가 하지 못하는 전문적인 견해, 자동차 제조사들이 내놓은 제품들의 기술적 완성도를 점검하는 것도 자동차 전문 미디어의 몫이었다. 제품을 소비자에게 소개하고, 소비자들이 고가의 제품을 구매할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자동차 전문 미디어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였다.
그런데 엔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인간을 더 빠르게 이동시키기 위해 발전을 거듭했던 엔진은 이제 발전을 멈추고 은퇴 수순에 들어간다. 우리는 곧 엔진과 작별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엔진의 역사와 함께했던 자동차 전문 미디어들은 어떨까? 우리도 엔진처럼 사라지게 될까?
내연기관이 전기로, 기계 문명이 디지털 문명으로 바뀌고 있는 지금, 수많은 자동차 미디어들도 변혁의 시대에 발맞춰 변화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시대가 원하는 이동의 가치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하고, 새로운 문명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며 콘텐츠를 제작해야 한다.
비록 별책부록이긴 하지만 <모터트렌드>가 전기차 전문지 <일렉트릭카>를 발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이전에 없던 새로운 미디어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싶었다. 내연기관이 전기로 바뀌는 게 단순한 동력계의 변화가 아닌 것처럼, 미디어도 단순히 제품만 다루는 것이 아닌 전기차와 자율주행 기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다. 배기가스가 전혀 없는 깨끗한 전기차처럼,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깨끗한 지면에 새로운 문명을 기록하고 싶었다.
더불어 누가 새로운 세상을 기록할 것인가도 중요할 것이다. 과거의 타성을 유산으로 착각하는 이에겐 새로운 세상을 기록할 자격이 없다. 현실 안주를 자신의 과업으로 여기는 자도 도태돼야 마땅하다. 새로운 세상의 태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또렷이 담아내려면, 타성에 젖지 않고 신문물에 대한 저항이 없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인물이 적당하다.
내연기관이 전기차로 바뀌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안타깝지만 <일렉트릭카>가 정기간행물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어쩌면 안 될 수도 있다). 그때까진 <모터트렌드>가 하이브리드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후배들이 그 역할을 잘 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불어 이달을 마지막으로 <모터트렌드>를 떠나는 안정환의 앞날도 찬란하게 빛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