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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Sep 10. 2021

고택에서의 하룻밤 그리고 술
with 폭스바겐 티구안

"자동차의 본질적 가치는 이동입니다. 인간은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바퀴 달린 마차를 고안했고, 말 대신 기름을 태우는 기계문명을 발전시키며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 문명을 전파…"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때려치웁시다. 우린 그저 자동차가 주는 이동의 즐거움을 탐닉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목적지는 경남 함양 개평한옥마을이고 신형 폭스바겐 티구안입니다. 

자동차 전문기자를 하면서 방방곡곡을 다녔습니다. 매달 1:50,000 지도를 확대 복사해(그 당시는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오프로드를 찾아다녔고, 오프로드를 다니지 못하게 된 후로는 매달 전국의 와인딩 로드를 뒤적였죠. 몸은 고됐지만 여행이라 생각하니 노역의 고됨을 잊게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회사 돈으로 매달 전국을 여행하는 호사를 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내가 가본 여러 여행지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장 또렷이 기억되는 곳 중 하나가 경남 함양 개평한옥마을입니다.

농익은 주행감각, 폭스바겐 티구안


신형 폭스바겐 티구안은 운전이 쉽고 편한 차입니다. 사실 티구안뿐 아니라 폭스바겐의 모든 차가 모두 그러하죠. 운전 자세를 잡기 쉽고 예측한 만큼 돌고 서며, 엔진 출력도 얼마나 밟으면 나오고 현재 잉여 출력이 얼마큼 되는지 쉽게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스바겐을 11년 넘게 타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티구안은 함안까지 내려가는 여행길에서 저속에서는 부드럽게 승차감을 조율하고, 고속도로에서는 약간 단단해지면서 직진 안정성을 높입니다. 덕분에 4시간 가까운 이동의 노고를 덜어줬어요. 차체 크기에 비해 19인치나 되는 큰 타이어를 끼웠음에도 승차감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섀시 강성이 큰 역할을 한 덕분일 겁니다. 더욱이 준자율주행 시스템은 논리와 작용은 빈틈없이 연동하면서 장시간 운전의 피로를 덜어주죠. 

네바퀴굴림이 들어갔음에도 실연비가 16km/ℓ 넘게 나오며 오너의 주머니 사정까지 배려합니다. 티구안은 일상생활에서도 훌륭하지만 오늘처럼 장거리 여행에서도 든든한 동반자가 아닐 수 없죠. 더욱이 농익은 엔진은 진동과 소음이 적고, 피렐리 스콜피온 베르디 타이어는 노면 소음도 적어요. 그렇게 티구안 덕분에 편하게 함양에 도착했습니다.


선비의 고장 경남 함양 개평한옥마을

‘좌 안동 우 함양’이란 말이 있습니다. 함양은 안동 못지않은 조선시대 유학자가 많은 고장입니다. 선비들의 학문이 높아 뛰어난 문신과 학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성리학의 대가로 동방오현(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중 한 사람인 일두(一蠹) 정여창(1450~1504년)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함양은 묵향만 짙게 날것만 같은 곳이지만, 우리 땅의 옛 선비들에게도 풍류는 있었을 겁니다. 그 풍류를 체험하기 위해 개평마을만 벌써 세 번째 방문이네요.

5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개평마을엔 일두고택(중요민속문화재 제186호)을 비롯해 아담한 고샅길을 따라 풍천노씨 종가(경남 문화재자료 제356호), 노참판댁(경남 문화재자료 제360호) 오담고택(경남 유형문화재 제407호) 등 유서 깊은 고가가 즐비합니다.

여러 고택 중 우리가 묵을 곳은 개평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일두고택입니다. 일두고택은 정여창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100년이 지난 후 그 후손들이 중건했습니다. 그러니 400년이 훌쩍 넘게 이 땅을 지키고 있던 셈입니다. 

삐걱거리는 솟을대문(가마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높게 설치한 대문)을 들어서면 축대 위에 떡하니 눌러앉은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일두고택엔 12동의 건물이 있는데, 대감의 처소인 사랑채가 가장 크고 높이 있어 그 위용이 대단합니다. 특히나 ‘충효절의’라 써놓은 대형 현판 때문인지 그 위세에 손이 모이고 자세를 바르게 하게 되네요. 

사랑채에 대충 짐을 던져놓고 대청마루에 몸을 뉘었다. ‘까마귀 대가리가 벗겨질 만큼 뜨겁다’는 처서 더위도 이곳에선 통용되지 않습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없음에도 신기하게 시원합니다. 옛 선비들은 이곳에 앉아 한여름 더위에도 글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공부만 하진 않았을 겁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매미 울음과 산새 소리뿐, 방문객도 없고 자동차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아요. 서울에선 매미 울음이 소음이었는데, 이곳에선 그저 듣기 좋은 가락처럼 느껴집니다.  

대청마루에 한참을 앉아 있으니 슬금슬금 졸립네요. 어쩌면 선잠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몽사몽간에 청아한 소리에 눈이 떠집니다. ‘이 맑은 소리는 뉘 집 풍경소리인가?’ 고무신을 신고 느릿느릿 마실을 나서봅니다. 

개평마을엔 60여 채의 한옥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수백 년 세월 동안 이 땅을 지켜온 소중한 유산입니다. 돌덩이가 촘촘히 박힌 고샅길을 따라 걸어도 좋고, 맑은 개울이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겨도 좋아요. 자그마한 고을은 휘둘러보는 데는 느린 걸음으로 30분이며 족합니다.

함양 선비들의 풍류, 솔송주


약간 작은 고무신 때문에 새끼발가락이 아파질 즈음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코끝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하죠. 난 이 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함양 선비들 풍류, 바로 ‘솔송주’입니다.

‘솔송주’는 함양의 하동 정씨 가문에서 5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전통 가양주입니다. 솔잎과 송순, 지리산 암반수, 찹쌀과 누룩으로 빚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주안상에 올랐고, 일두 선생이 제사의 제주로도 올릴 정도로 귀한 술이에요.  

솔송주는 은은한 솔향과 약간의 단내가 나는 감칠맛이 일품입니다. 입에 털어 넣자마자 솔향이 그윽하게 올라오고 꿀떡 삼켜 술이 구비에 닿으면 그 향이 폭죽처럼 터져 뇌까지 이르죠. 술을 삼켜도 약간의 단맛이 혀끝에 남아 기분을 좋게 합니다. 끝에 단맛이 나는 이유는 주조과정에서 꿀을 약간 첨가하기 때문인데, 단맛을 내기 위함이 아니라 술이 익는 과정에서 산패되는 걸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난 이 술을 마시기 위해 이곳에 왔을지 모릅니다. 한국 전통주는 온라인으로 구매가 가능하고 나도 솔송주를 몇 번 주문해 마셨지만, 이곳에서 접했을 때만큼 마음을 흔드는 향은 아니었거든요. 달빛이 고요하게 내려앉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달과 별을 벗 삼아 마신 솔송주는 그 순간만큼은 번뇌와 번민을 잊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 술은 이 땅에서 500년간 백성의 시름을 달랬을 겁니다. 

솔송주 문화관인 ‛명가원’도 이곳을 대표하는 고택 중 하나로 350년이나 됐어요.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곳이지만, 대부분 대문을 활짝 열어 지나는 손님을 반깁니다. 그런데 손님이라고 해봤자 몇 명 없어요. 개평마을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명가원도 일두고택과 마찬가지로 한옥스테이를 운영합니다. 이곳에 투숙하면 하동 정 씨의 16대 손부인 박흥선 명인(제35호 무형문화재)이 직접 내린 술을 바로 받아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솔송주는 알코올이 13%밖에 되지 않지만, 방금 증류해 내린 따끈한 술은 70%에 달해요. 직접 맛을 보면 알코올 도수가 높지만 자극적이지 않고 목 넘김이 부드럽습니다.  

이윽고 개평마을에 밤이 왔네요. 산새도 매미도 멀리서 온 객의 밤을 배려한 듯 울지 않는 밤입니다. 달빛은 그윽하고 풀벌레 소리는 달달합니다. 드디어 솔송주의 밤이 열리는 시간인 거죠. 좋은 술과 벗이 있는 함양 선비들의 풍류가 펼쳐지는 밤입니다.

글 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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