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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Dec 06. 2022

부가티, 과잉의 역사

어떠한 방식으로든 과하되 부족하지 않는 차가 부가티다

18년 전, 16개의 실린더에 4개의 대용량 터보가 달린 엔진을 자동차에 넣겠다는 생각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엔진룸이 극히 부족한 미드십 구조에 말이다. 당시로서는 ‘미친 발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진짜로 이런 차가 세상에 나왔다. 폭스바겐의 괴짜 엔지니어들이 만든 그 차는 양산차 최초로 1000마력을 넘었다. 괴짜가 세상을 바꾼 것이다. 부가티 베이론 이야기다. 

2014년 부가티는 베이론의 마지막 버전을 공개했다. 자동차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과한 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듬해 베이론 후속 시론이 또다시 세상에 나왔다. 물론 과하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출력과 속도와 가격을 앞세웠다. 부가티에게 넘치지 않는 것은 딱 하나 한정생산(400대)뿐이다. 생각해보면 부가티라는 브랜드는 태생부터 아주 특별했다. 

부가티 창업자인 에토레 부가티는 1881년 이탈리아 밀라노의 부유한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에토레의 할아버지인 지오바니 뤼지는 건축가 겸 조각가였고 아버지 까를로는 아르누보 가구와 보석 디자이너로 명성이 자자했다. 에토레의 남동생 렘브란트는 조각가였고 고모는 화가 지오바니 세가니티의 부인이었다. 순수미술에서부터 다양한 파생 예술까지 부가티 집안은 대대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예술가 집안이었다. 

그런데 에토레 부가티가 붓과 조각칼이 아닌 망치와 스패너를 잡게 된 배경에는 그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 까를로 부가티는 유럽의 산업혁명 말기에 증기기관 삼륜 자동차를 생산했다. 돈 쓸 궁리하는 부호들에게 삼륜차는 돈 자랑하기에 가장 좋은 오브제였고, 이탈리아의 내로라하는 예술가 집안에서 만든 삼륜차는 우아하면서도 고급스러웠다. 당연히 부가티 집안은 돈을 많이 벌었다. 

에토레는 어려서부터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기계를 배우고 익히며 자동차의 구조와 기술을 공부했다. 예술보다는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아버지처럼 자동차가 돈이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1909년,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에토레 부가티는 집안 이름을 딴 부가티 오토모빌을 세운다. 그런데 그의 고향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의 몰샹에서였다. 그가 프랑스를 택한 이유는 모터스포츠 때문이다. 당시는 돈 많은 사람끼리 프랑스 르망이나 모나코에 모여 자동차경주를 펼치곤 했다. 에토레는 자동차경주에서 그가 만든 차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를 선택했다. 그리고 당시 몰샹은 독일의 지배를 받고 있어 독일인 엔지니어 수급도 쉬웠다. 몰샹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와 직선으로 100킬로미터 남짓 되는 가까운 거리다.

에토레가 만든 차는 대단했다. 당시는 모든 부품을 손으로 만들 때였는데, 부가티의 차들은 그 정교함이 그 어떤 차보다 뛰어났다. 모든 부품들이 완벽히 들어맞았고 엔진은 별도의 밀봉을 하지 않아도 비가 한 방울도 스며들지 않았다. 연료나 오일 누유도 없었다. 기술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자동차였다. 

자동차경주에서도 부가티는 단연 돋보였다. 부가티 타입 35는 1924년부터 2000번이 넘는 레이스에서 우승했다.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에서는 1925년부터 5년 연속으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처음 출전한 1929년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가장 먼저 체커기를 받으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르망에서도 1937년과 1939년에 우승컵을 차지했다. 당시 최고의 드라이버로 꼽히는 장 피에르 위밀과 피에르 베이론은 부가티와 함께 유럽의 각종 레이싱을 호령하며 위세를 떨쳤다. 

이 당시만 해도 부가티는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내구성이 가장 뛰어나며 깊이 있는 예술성까지 지닌 명실상부 최고의 자동차 메이커였다. 에토레도 이런 목적으로 부가티를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전 세계 왕족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부가티를 판매하려 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회사가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유럽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더니 경제대공황이 일어났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까지 발발했다. 부가티 공장은 잿더미가 됐다. 각국의 군주제는 폐지됐고 부유층은 몸을 숨겼다. 그렇게 부가티의 판로도 막혔다. 

차가 판매되지 않으니 사세는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47년 에토레는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아들이 부가티를 이어받았지만 이미 기울어진 회사는 다시 살리기 힘들었고 1952년 부가티는 생산이 중단됐다. 

여담이지만 “전쟁과 경제공황이 왔을 때 에토레가 회사를 유연하게 이끌어갔다면 부가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살아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는 말이 있다. 그는 경기가 바닥을 쳤을 때도 가장 빠르고 럭셔리한 차를 고집했다. 그게 부가티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때 에토레가 좀 더 느리고 저렴한 차를 만들었다면 어쩌면 부가티는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에토레의 고집과 차에 대한 자부심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부가티 타입 35의 브레이크에 불만을 토로한 소비자가 있었다. 에토레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달리는 차를 만들지 서는 차는 만들지 않는다.” 에토레는 죽는 그날까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차에 대한 과한 욕심과 자존심을 굽히지 않다. 

이후 부가티 브랜드는 이리저리 팔려 다녔다. 그런데 예전 부가티 성능을 이끌어내지도 못했고 아름답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부가티를 잊어갔다. 그런데 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1998년, 부가티가 기울어진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범국 독일의 폭스바겐이 브랜드를 인수한 것이다.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를 꿈꾸던 폭스바겐은 그 어떤 자동차 메이커도 범접할 수 없는 가치와 성능을 지닌 브랜드와 차를 원했고 그들이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는 걸 기술로 증명하고 싶었다. 

부가티 부활을 위해 폭스바겐 그룹의 뛰어난 엔지니어들이 모였다. 그들은 세계 최고를 넘어 최초에 도전했다. ‘양산차 최초의 시속 400킬로미터와 1000마력.’ 당시로서는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다. 자동차는 시속 400킬로미터를 넘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폭스바겐 그룹의 괴짜 엔지니어들은 속도에 대한 욕망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수년 동안 개발이 진행됐다. 그리고 엔진 레이아웃이 결정됐다. 4.0리터 V8 엔진을 두 개 붙여 W형의 16기통 8.0리터를 만들기로 한 것. 그런데 이걸로는 1000마력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용량 터보차저를 네 개 붙였다. 네 개의 실린더마다 한 개의 터보가 기름을 더 많이 태울 수 있도록 공기를 주입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그렇게 1001마력을 만들어냈다. 손실 없이 1001마력이 노면에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네바퀴굴림을 채택했다. 그리고 도로에 내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시속 400킬로미터를 견뎌낼 수 있는 타이어가 없었다. 당연했다. 시속 40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차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미쉐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쉐린도 좋아했다. 부가티와 함께 그들의 기술력을 만방에 떨칠 수 있는 기회였다. 미쉐린은 항공기 타이어 기술을 접목해 시속 450킬로미터까지 견딜 수 있는 타이어를 만들었다. 타이어 네 짝 가격이 무려 1800만 원이다. 

엔진과 타이어가 준비됐지만 시속 400킬로미터로 달릴 수 트랙이 없었다. 괴짜 엔지니어들은 미국 보네빌 소금사막으로 차를 끌고 갔다. 그리고 양산차에게 성역이나 다름없었던 시속 400킬로미터에 최초로 도달했다. 그리고 이 차의 이름을 베이론이라 명명했다. 1939년, 르망에서 부가티 타입 35를 타고 우승컵을 들어 올린 드라이버의 이름이다.  

부가티는 폭스바겐 산하에서 다시 세계 최고의 자동차 브랜드가 됐다. 폭스바겐도 부가티를 통해 그들의 기술력을 증명했다. 에토레 부가티가 원했던 대로 부가티는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비싼 럭셔리 브랜드가 됐다. 만약 에토레가 세상과 타협해 싸고 느린 차를 만들었다면 폭스바겐은 부가티 브랜드를 부활시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산 이후 10년 동안 베이론의 최고속도는 시속 431킬로미터로 늘어났고 최고출력도 1200마력이 됐다. 다만 최고속도 타이틀은 다른 차에 내주었다. 시속 400킬로미터를 최초로 주파한 선구자에게 도전하는 브랜드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에토레 부가티가 부가티 브랜드를 만들었을 때나 18년 전 폭스바겐이 부가티 베이론을 만들었을 때도 부가티는 한껏 과장된 기술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베이론 이후 신형 시론이 출시될 때도 우리는 또 한 번 그들의 과잉의 역사에 혀를 내둘렀다. 부가티는 언제나 그런 브랜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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