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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

2013년 르망은 가장 경이롭고 존경스러운 순간이 아니었을까?

by 이진우

2013년 6월, 프랑스 르망에서 펼쳐지는 24시간의 사투를 현장에서 직접 관람했다. 내 인생에 있어 몇 안 되는 경이롭고 거룩했던 24시간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24시간의 경주가 끝났을 때 포디움 가장 위에서 눈물을 흘리던 한 남자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톰 크리스텐센. 2012년까지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서 무려 7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린 전설과 같은 드라이버다. 그가 아우디 팀의 2번 차를 타고 2013년 르망에 출전했다. 당시 아우디는 석 대의 경주차를 투입했고 2, 3번은 1번 차의 우승을 서포트하는 페이스메이커인 동시에 유사시에는 우승을 노려야 하는 임무가 있었다.

경주가 시작된 지 10시간 후인 새벽 1시경, 아우디 1번 경주차가 기어박스 고장으로 피트에 50분이나 묶여 있었다. 계획대로 아우디의 2번 경주차가 우승을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게 됐다. 백전노장 톰 크리스텐센과 앨런 맥니시 그리고 신성 로익 뒤발이 탄 아우디 2번 경주차는 그 임무를 충실하고 훌륭히 해냈다.

포디움 맨 위에서 크리스텐센이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관중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다만 크리스텐센의 눈물은 기쁨이 아닌 친구를 잃은 슬픔의 눈물이었다. 실은 경주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사고가 있었다. GTE AM 클래스에 출전한 애스턴마틴의 95번(앨런 시몬센)가 시속 200km의 속도로 방호벽을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다. 도어가 날아가고 떨어져 나간 바퀴가 서킷을 나뒹굴 정도로 큰 사고였다. 다음 날 아침, 경주장 한 귀퉁이에 자그마한 헌화가 생겼다. 병원으로 이송된 앨런 시몬센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앨런 시몬센은 톰 크리스텐센과 같은 덴마크인으로 여러 레이스에 같이 출전했던 동료다. 크리스텐센은 세상 모든 이에게 축하받는 자리에서 즐거워할 수 없었다.

12년 전, 지구에서 가장 빠른 사내의 눈물은 르망 90년 역사 동안 잊힌 드라이버와 경주차에 대한 헌정이면서, 서킷에서 생을 마감한 수많은 드라이버를 위한 추모와 애도도 담겨있었을 것이다. 크리스텐센은 이듬해 르망에서 은퇴했고 세상은 그를 ‘미스터 르망’이라 부른다. 크리스텐센이 르망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닐는지. 확실한 것은 르망 100년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드라이버가 분명하다. 더불어 그가 타고 경주를 완전히 지배했던 R18 e-tron quattro 디젤 하이브리드 경주차도 르망 역사에 또렷한 족적을 남겼다.

12년이 지난 지금.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규정과 경주차가 바뀌었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바뀌지 않은 게 있다.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달린다는 것. 르망은 지구에서 가장 가혹하고 처연한 경주가 아닐 수 없다. 24시간 동안 가장 먼 거리를 달리는 가장 단순한 룰이 인간과 기계에 가장 가혹한 고통을 가한다. 그리고 지난 100년간 수많은 레이싱 팬들이 그 고통을 즐겼다. 그리고 24시간의 고통을 이겨낸 드라이버에게 존중과 존경과 경배를 담아 가장 싱싱한 꽃다발이 전해진다.

바뀐 규정에 따라 지금의 르망 경주차는 12년 전보다 느려졌다. 하지만 출전 비용과 경주차 제작 비용이 줄면서 더 많은 경주팀이 출전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경주는 더욱 치열해졌고 볼거리가 많아졌다. 올해도(6월 15일) 새로운 팀과 새로운 드라이버가 세계 최고의 레이싱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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