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의 그림자 - 2
우리는 겉모습만 보지 말라고 배우면서도, 언제나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다.
이 모순은 우리가 위선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강하게 ‘겉모습’에 끌려 판단을 시작하는 존재인지 보여주는 증거에 가깝다.
“얼굴값한다”는 말은 누군가의 외모가 그 사람의 태도나 대우를 보증하는 것처럼 쓰인다. 반대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라”는 말도 있다. 두 문장은 서로를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같은 현실을 다른 방향에서 가리킨다. 겉모습이 판단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어떤 문화는 그 사실을 냉소로 인정하고, 또 어떤 윤리는 그 사실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서로 상충되는 말들이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외모가 얼마나 강한 힘을 갖는지 알려준다.
그렇다면 외모의 힘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외모가 타인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에는 비교적 쉽게 동의한다. 그런데 한 단계 더 들어가면 질문이 바뀐다. 외모는 그 사람의 성격까지 바꿔 놓을까. 아니면 성격이 외모를 바꿔 놓을까. 얼핏 보면 닭과 달걀의 문제처럼, 어느 쪽이 먼저인지 쉽게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외모가 성격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때, 사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외모 그 자체가 아닐지 모른다. 외모가 불러오는 주변의 대우다. 호감이 기본값이 되는 사람은 갈등에 덜 노출되고, 날선 반응을 덜 맞는다. 그 결과 둥글둥글한 태도를 ‘선택’한다기보다, 그 태도가 굳어지는 방향으로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거울과 사진, 남의 시선 속에서 반복되는 자기 이미지다.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고, 그 이미지에 맞춰 스스로를 조정한다. 또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취급받는지를 관찰하며, 앞으로 자신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를 예측하고 대비한다. 그 예측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성격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흐름을 곧바로 개인 평가로 바꾸는 순간, 불공정이 시작된다.
내 옆에 외모가 뛰어나서 남의 호감을 쉽게 사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너무 뛰어나 거리감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뛰어나 오히려 다가가고 싶은 느낌을 주는 사람. 그 사람은 대체로 둥글둥글해 보일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쟤는 외모 덕에 편히 살았으니까 성격이 저런 거지. 극한 상황에 처하면 본래 성격 나올걸?”
그 말은 일견 그럴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잔인하다. 왜냐하면 검증할 수 없는 가정으로 한 사람의 성품을 깎아내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극한이면 본성이 나온다”는 말은 반박도, 입증도 쉽지 않다. 하지만 쉽게 튀어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종종 사람을 재단하는 도구로 쓰인다.
결국 우리는 한 가지를 인정해야 한다. 외모가 성격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꽤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근거로 “너는 원래 이런 사람일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똑같은 순탄한 성장 과정을 거쳤어도 성격이 모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험난한 성장 과정을 겪고도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환경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영향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 그 다양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그리고 중요한 건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외모는 성격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가령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은 몸이 변하기 마련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격이 외모를 ‘바꾼다’기보다 외모의 사용법을 굳힌다. 표정, 자세, 말투, 눈빛의 온도, 자기를 돌보는 방식. 이런 것들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고 반복 속에서 얼굴과 몸에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순간 “40대가 되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같은 말을 하게 된다. 그 말은 한편으로는 ‘얼굴은 살아온 방식의 기록’이라는 통찰을 담지만, 쉽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 기록이 언제나 개인의 선택만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말해버리는 순간, 삶의 조건을 지운 채 개인에게만 책임을 떠넘기기 쉽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점을 외모에서 부로 옮겨보면, 같은 구조가 더 분명해진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자원이 넉넉하면 불안이 줄고, 불안이 줄면 타인을 대할 때도 방어가 느슨해진다. 그 느슨함이 관대함으로 보일 수 있다. 특히 삶이 빡빡할 때에는 돈이 조금만 늘어도 사람이 숨을 돌리고, 그것이 인심처럼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절대불변의 진리로 믿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현실을 놓친다. 각종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부자들을 떠올려보면, 곳간이 인심을 자동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는 여유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예외 의식도 가능하게 한다.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경험이 늘어나면, 사람은 자신이 규칙의 바깥에 있다고 느끼기 쉽다. 부가 커질수록 생활 세계가 보통의 삶과 멀어지면서, 타인의 현실을 체감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즉, 부는 인심의 연료가 되기도 하지만, 오만의 연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마라”는 말을 다르게 읽게 된다. 그 말은 겉모습을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겉모습을 보는 일이 얼마나 빠르게 이뤄지고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잊지 말라는 경고다. 우리는 외모를 보고 성격을 짐작하고, 부를 보고 인심을 예측한다. 그리고 그 예측을 사실처럼 굳혀 버린 채 사람을 대한다. 그 순간부터 이미 게임은 시작된다. 추측은 대우가 되고, 대우는 습관을 빚고, 습관은 결국 그 사람의 표정과 말투가 된다. 우리는 나중에 그걸 보고 “봐, 내가 맞았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맞음은 관찰의 승리가 아니라, 누군가가 오래 버텨낸 결과일 때가 많다.
내가 불편한 건 바로 그 지점이다. “쟤는 외모 덕에 편히 살아서 성격이 저런 거야” 같은 말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너무 쉽게 한 사람의 삶을 요약해 버린다. 마치 그가 받은 호의는 다 공짜였고, 그래서 지금의 태도도 다 가짜라는 듯이. 반대로 “가난하면 인심도 없다”는 말도 비슷하다. 힘들면 날카로워질 수 있다는 설명이 어느 순간, 힘든 사람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는 판결이 된다. 그 말들은 사람을 이해하는 문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재단해 버리는 문장이다. “너는 결국 그럴 거야.” 그 한마디로.
그리고 우리는 그런 판결을 ‘진짜’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극한이 오면 본성이 드러날 거야.” 그 말에는 이상한 안도감이 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면 하나로, 지금 여기의 사람을 미리 단정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사람은 한 번의 극한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사람은 대개, 오래 반복된 취급 속에서 서서히 변한다.
결국 중요한 건 외모가 먼저냐 성격이 먼저냐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취급해 왔는가다. 겉모습은 성품의 증거라기보다, 성품이 자라나는 환경의 스위치다. 그리고 그 스위치를 쥔 쪽은 대부분 ‘그 사람’이 아니라 타인인 ‘우리’다. 나는 우리가 누군가를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순간의 속도를 조금만 늦추면 좋겠다. 판단을 멈추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 사람을 한 문장으로 단정하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대우 속에서 어떤 표정을 배우게 됐는지까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사람은 본성으로만 남지 않는다. 사람은 반복해서 받은 취급만큼 변해 가니까.
이 에세이에 큰 영감을 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를 너무 빨리 단정해 버렸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은 얼굴과 몸. 나는 그런 외모가 불러오는 대우를 먼저 떠올렸고, 그 대우가 만들어 냈을 법한 성격까지 미리 예상해 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경계심도 있었다. “저 사람은 자기 잘난 맛에 살겠지.” 내가 만든 착각은 얇았고, 결론은 너무 쉬웠다.
그 친구는 내가 상상한 대로는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조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웃음을 띤 얼굴 뒤로 허당 같은 순간도 자주 비쳤다. 잘난 척을 하지 않으니 주변 사람들도 더 편하게 다가갔다. 어떤 이들은 그를 놀리듯 사랑했고, 동시에 그에게서 묘한 안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마음을 열었다. 그에게 전형적인 모습이 없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편하게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놀랐던 건 그가 특별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너무 당연하게 믿어 온 편견이 생각보다 얇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잘생긴 백인 남자’라는 범주로 먼저 밀어 넣었고, 그 범주가 어떤 성격을 낳을 거라고 거의 자동으로 떠올려 버렸다. 그리고 그 예측이 틀렸을 때, 나는 그를 새롭게 알게 된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얼마나 쉽게 겉모습으로 사람을 재단하는지 깨닫게 됐다.
그 이후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우리는 정말로 사람을 읽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이야기를 덧씌우는 걸까. 어쩌면 누군가의 겉모습이 알려주는 건 그 사람에 대한 진실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편견의 깊이일지도 모른다. 이 에세이는 그 친구를 통해 내 안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떠오른 편견이 깨진 순간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너를 안다”고 말해 버리기 전에, 내가 무엇으로 ‘안다’고 느끼는 건지 한 번 더 묻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