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와 친밀함의 관계

몸의 거리와 마음의 거리 사이

by Epiphanes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돌아온 날에는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전보다 조금 덜 낯설게 느껴진다. 서로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어도 그렇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나면 관계가 꽤나 가까워진 것만 같다. 우리는 흔히 이런 걸 친해졌다고 말한다. 그것이 단지 기분 탓일까.


물론 사람과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활동은 식사만이 아니다. 함께 일을 해도 가까워질 수 있고, 운동 같은 협력을 요하는 활동을 해도 그렇다. 술을 마시며 속내를 털어놓을 때도 있다. 그런데도 식사에는 다른 종류의 친밀감이 있다. 더 조용하고, 더 안정적이고, 더 생활에 가까운 친밀감이다. 누군가와 한잔 술을 마신 뒤에는 순간적으로 벽이 허물어진 것 같을 수 있지만, 함께 밥을 먹은 뒤에는 그 사람과 일상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아마 식사라는 행위에는 아주 오래된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은 원래 생존과 연결된 것이고, 그것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같은 자원을 나눈다는 뜻이다. 같은 식탁에 앉게 되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서로가 경쟁자가 아니라는 것을 묵시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것을 몸으로 이해한다. 이 사람이 지금 내 곁에 있어도 되는 사람이라는 감각은 어쩌면 아주 오래된 관습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식사는 사람을 일시적으로 무방비하게 만든다. 밥을 먹는 동안 우리는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없다. 입을 열고, 손을 움직이고, 음식을 씹고, 맛에 반응하고, 타인의 속도에 맞춘다. 대화가 잠시 끊겨도 어색함이 덜하고, 침묵조차 자연스럽게 견딜 수 있다. 회의실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와 식탁에서 마주 앉아 있을 때 사람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식사는 리듬을 공유하게 만든다. 같이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비슷한 순간에 첫술을 뜨고, 잠시 이야기를 멈춘 채 씹고, 다시 대화를 잇는다. 이런 작은 동기화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진다. 친밀감은 늘 거대한 고백이나 극적인 사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같은 속도로 시간을 보내는 경험, 같은 장면 안에 함께 머무는 경험이 관계를 조금씩 바꿔 놓는다. 식사는 바로 그런 경험을 가장 자연스럽게 제공하는 행위 중 하나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비가 떠오른다. 더 강한 신체적 접촉이 더 깊은 친밀감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성교야말로 훨씬 더 깊은 친밀감을 만들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몸과 몸이 가장 가까워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때로는 함께 밥을 한 끼 먹는 것보다도 덜 가까워진 채 끝나기도 한다. 몸의 거리가 마음의 거리로는 곧바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아마 성교는 식사보다 훨씬 더 많은 해석을 불러오는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식사는 비교적 단순하다. 함께 먹는다는 사실 자체가 관계의 긍정적 신호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그러나 성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외로움의 해소인지, 확인 욕구인지, 순간의 충동인지, 관계의 시작인지 끝인지 사람들은 끊임없이 해석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한 사람은 깊은 연결을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별 의미 없는 일로 정리할 수 있다. 몸은 가까웠지만 의미는 엇갈린다.


게다가 성교는 취약성을 동반하는 만큼 자기방어도 강하게 불러온다. 사람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애써 무심한 척하기도 하고, 반대로 혼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친밀감이란 결국 안전하다고 느낄 때 자라는 것인데, 오늘날의 관계는 종종 그 안전을 충분히 보장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교는 가까움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각자의 불안과 기대와 두려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여기에는 지금 시대의 분위기도 작용한다. 오늘날 성은 서로를 알아 가는 방법이라기보다, 때로는 서로의 매력과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소비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가치를 시험하거나 스스로를 증명하는 장면이 되어 버리면 몸의 접촉은 있어도 마음의 연결은 남지 않는다. 함께 밥을 먹을 때 우리는 비교적 쉽게 같은 시간을 나누지만, 성교는 경우에 따라 같은 시간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각자 필요한 것을 가져가는 일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그때 남는 것은 충족감이 아니라 공허함일지도 모른다.


식사와 성교는 단순히 행위의 강도만 다른 것이 아니다.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식사는 낮은 위험 속에서 반복 가능한 친밀감을 만든다. 부담이 크지 않으면서도 함께 있음의 리듬을 쌓게 해 준다. 반면 성교는 훨씬 높은 취약성과 기대를 동반한다. 그래서 잘 맞물리면 깊은 유대를 만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거리감만 남길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순간의 강렬함보다 꾸준한 반복의 가능성인지도 모른다. 오래 가는 관계는 대개 거창한 사건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이 밥을 먹고, 함께 걷고, 잠깐의 침묵을 견디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고, 그러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 쌓여 관계가 돈독해진다. 누군가를 더 가깝게 느끼게 하는 것은 오히려 소박하고 반복 가능한 시간을 보내는 것일 때가 많다.


그래서 누군가와 밥을 먹고 난 뒤 그 사람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것은 단순한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단지 음식을 먹는 일이 아니라, 당신과 나는 지금 이 시간을 함께 보내도 되는 사이라는 오래된 확인이다. 몸을 스치는 것보다 같은 식탁을 나누는 일이 때로 더 깊은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다고 본다. 가까움이란 격렬한 접촉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같은 시간을 견디고 나누는 데서도 태어난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의 혼밥 문화도 조금 다르게 읽힌다. 혼밥은 단순한 고립이 아니라, 함께 먹기의 리듬이 개인의 시간으로 재편된 풍경에 가깝다. 누군가의 속도에 맞추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애쓰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리듬대로 한 끼를 해결하는 일. 그것은 분명 자유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자유는 함께 밥을 먹을 관계와 시간이 줄어든 시대의 고독을 함께 품고 있기도 하다.


먹방 문화는 그 점에서 더 흥미롭다. 사람들은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화면 속 누군가가 먹고 말하고 반응하는 장면을 틀어 놓는다. 실제로 같은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장면을 통해 식사의 리듬만큼은 빌려 오는 셈이다. 함께 먹는 일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대리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혼밥이 개인화된 식사라면, 먹방은 외로움을 덜기 위해 만들어 낸 가상의 동석에 가깝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더 자유로워졌으면서도, 여전히 완전히 혼자 먹는 일에는 쉽게 익숙해지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식사는 원래 배를 채우는 일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사람과 사람 사이의 리듬을 만들고, 서로를 덜 낯설게 만드는 조용한 의식이었다. 혼밥과 먹방의 시대는 어쩌면 그 오래된 기능이 사라진 시대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겨우 이어지고 있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가깝게 만드는 것은 순간의 강렬함이 아니라, 함께 반복한 시간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