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은 언제 포토존이 되었나
요즘 같은 봄이면 이름난 출사지마다 사람들이 몰린다. 카메라를 멘 사람들, 삼각대를 펼친 사람들, 휴대폰을 들어 올린 사람들까지 모두가 같은 풍경 앞에 선다. 꽃은 잠깐 피고 금세 지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봄을 자기 방식대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은 꽃을 눈으로 보고, 어떤 사람은 꽃길을 걸으며 느끼고, 어떤 사람은 사진으로 남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꽃을 보러 온 사람들이 어느 순간 꽃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순간보다 먼저 프레임을 점유하려 들 때, 봄은 감상의 계절이 아니라 경쟁의 계절처럼 변해 버린다.
최근 화엄사의 홍매화를 둘러싸고 여러 말이 나왔다.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프레임에 들어오는 일반 방문객들에게 거칠게 반응했다는 이야기가 퍼졌고, 뒤이어 화엄사가 실제로 홍매화를 주제로 한 사진 콘테스트를 열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물론 사진 콘테스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찰이 문화 행사나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도 있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려는 취지도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런 명분이 현장에서 어떤 태도로 나타나느냐다. 사찰이 주최한 행사라는 이유로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윽박지를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니다. 일반 방문객은 방해물이 아니다. 그들도 같은 봄을 보러 온 사람들이다. 꽃 앞에서 누가 더 전문 장비를 들었는지, 누가 더 오래 기다렸는지, 누가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지는 그 공간에서 본질적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마치 자신이 더 정당한 사용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매년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사진을 반복해서 찍으려 할까. 겉으로 보면 단순한 취미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꽤 복합적인 심리가 담겨 있다. 같은 장소를 계속 찍는 일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관찰의 훈련일 수도 있다. 같은 나무를 해마다 찍다 보면 빛이 바뀌는 시각, 바람의 결, 주변의 공기까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수 있다. 진짜 사진가라면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깊이 있는 사진을 얻기 위해 같은 사진을 계속 찍는 것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이미 인정받은 아름다움을 가장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욕망 때문이다.
이름난 출사지에는 이미 정답처럼 유통되는 공식이 있다. 어느 각도에서 찍어야 하는지, 어느 시간대가 좋은지, 어떤 구도가 가장 ‘작품 같아’ 보이는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동호회 문화와 공모전 문화, 그리고 SNS가 이런 경향을 더 강하게 만든다. 낯선 풍경을 스스로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만, 이미 유명한 장소에서 이미 검증된 구도를 따라가는 일은 비교적 쉽다. 그렇게 얻은 사진은 실패할 확률도 낮고, 반응도 안정적이며, 때로는 수상이나 인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그들이 집착하는 것은 꽃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사회적으로 승인된 아름다움일 때가 많다.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좋다고 말한 아름다움을 자기 손으로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순간 출사는 감상이 아니라 점유가 된다. 봄꽃은 원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풍경인데, 카메라가 개입하는 순간 그 풍경은 누군가의 결과물을 위한 재료처럼 바뀐다. 이때 다른 사람은 함께 꽃을 보는 방문객이 아니라, 프레임을 더럽히는 존재로 취급되기 쉽다. 사람이 한 발만 옆으로 비켜 주면 더 좋은 사진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이미 꽃을 자연물로 보고 있지 않다. 그는 꽃을 이미지로 보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머릿속에 완성돼 있는 ‘좋은 사진의 모델’을 현실 위에 덮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란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그의 말을 아주 쉽게 풀어 쓰면 이렇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미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이미지와 코드로 현실을 먼저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 장소보다 그 장소의 ‘대표 이미지’가 먼저 머릿속에 들어와 있고, 현실은 그 이미지에 맞춰 정리된다. 화엄사의 홍매화도 그런 식으로 소비된다. 사진 동호회 사람들은 그날 그 자리의 꽃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수없이 보아 온 ‘화엄사 홍매화 작품사진’을 다시 생산하러 가는 것에 가깝다. 그러니 실제의 꽃, 실제의 바람, 실제의 사람들은 점점 중요하지 않게 된다. 현실은 지워지고, 이미지의 모델만 남는다. 그때 프레임에 들어온 방문객은 함께 봄을 누리는 타인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되어 버린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찰이라는 공간은 더 큰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이 일이 평범한 관광지에서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저 출사지의 흔한 무례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찰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적어도 많은 사람에게 사찰은 조금 더 조용하고,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공간으로 여겨진다. 꼭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사찰의 공기는 원래 사람을 다그치기보다 늦추고, 욕심을 부추기기보다 조금 내려놓게 하는 쪽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공간이 어느 순간 수상과 인증과 결과물을 위한 배경처럼 기능하고, 그 과정에서 평범한 방문객이 배제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예절 문제를 넘어 공간의 정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게 된다.
더구나 불교에서 자비와 공존은 주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수행의 핵심에 가깝다.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거창한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같은 세상을 함께 쓰고 있다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내가 보고 싶은 꽃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얻고 싶은 한 장의 사진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더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바로 그런 태도가 자비에 더 가깝다. 그런데 꽃을 담으려다 사람의 마음을 먼저 꺾는다면, 그 사진은 과연 무엇을 담은 것일까. 아름다움을 기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름다움을 빌려 욕망을 증명한 것에 가까울까.
나는 화엄이라는 말이 이 장면에서 더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화엄의 꽃은 혼자 피어 완성되는 꽃이 아니라, 서로 기대고 어우러질 때 비로소 의미를 얻는 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봄꽃은 원래 배타적인 풍경이 아니다. 누군가가 독점할 수 없는 계절이고, 모두가 함께 잠깐 누릴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 앞에서 사람을 밀어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타인을 배경에서 삭제해야만 만족할 수 있다면, 그건 봄을 담는 것이 아니라 봄을 점유하는 것이며, 꽃의 아름다움이 아닌 자신의 결과물만을 우선한 것이다.
결국 문제는 사진과 카메라가 아니다. 문제는 태도다. 같은 꽃 앞에서도 어떤 사람은 오래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조용히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사진으로 남긴다. 그 모든 방식은 함께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기 방식만을 정답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지워야 할 장애물로 여기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경쟁이 되고, 점유가 되고, 때로는 폭력이 된다. 장비가 커질수록 시야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좁아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런 장면에서 다시 보게 된다.
누군가는 그날 화엄사에서 홍매화의 붉은 빛보다 타인의 날카로운 말투가 가슴에 더 깊게 새겨졌을지 모른다. 봄을 보러 갔다가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처럼 느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날 가장 먼저 진 것은 꽃이 아니라 자비였을 것이다.
사찰은 꽃을 보여 주는 곳일 수 있다. 사진을 찍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을 품는 곳이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장비로, 아무리 아름다운 빛 속에서, 아무리 완벽한 구도로 찍은 사진이라도 그 한 장을 얻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꺾었다면, 나는 그 사진이 아름답다고 하고 싶지 않다. 타인을 지워 내고 얻은 홍매화 사진은 예술의 기록이라기보다 탐욕의 기록에 더 가까우니까. 꽃은 피어 있었지만, 그 꽃 앞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정말 돌아봐야 할 것은 바로 그 점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