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요즘은 모두가 끊임없는 해쉬태그의 홍수 속에서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빛 좋은 디저트 카페를 발굴해낸다. 사진 한 장이 예뻐서 주목을 받으면 모두가 그 카페로 몰려가 디저트보다 사진을 소비한다. 몇 달 뒤면 그들이 소비하는 사진은 다른 곳으로, 또 다른 곳으로 유목민처럼 이동한다. 카페 유목민이 생길 정도로 수도 없이 카페들은 생겨나고, 사라진다. 이 혼잡한 카페의 시대에 나는 종종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삼삼오오 공부하거나 수다를 떠는 여고생들을 많이 보곤 한다. 그럴 때면 늘, 십여 년 전 나의 고등학생 시절을 되짚어 본다.
여고생들이란 학교에서 수다를 떨고, 집에 돌아가서 전화로 수다를 떨어도 못다 한 수다를 떨 장소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장소가 적어도 카페는 아니었다. 카페가 이렇게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전이고, 요즘은 흔한 대형 카페들도 잘 없었거니와 그때 내가 살던 서울의 어느 구석 동네까지 들어올 리 만무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카페 비스름한 것은 있었다. 당시에 왜 그렇게 유행처럼 생겼는지 모를, 빙수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전문점이었다. 작은 동네의 몇 개 안 되는 번화가 어디든, 이름만 조금씩 다른 디저트 가게들이 하나씩은 꼭 있었다. 레드망고, 아이스베리, 캔모아. 지금의 카페들에 비하면 귀엽고 아기자기한 이름이 붙어있는 이런 곳은 그 동네 여고생들의 만남의 광장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주머니 속 지폐를 털어 몇 명이 빙수 하나를 시켜 놓고 몇 시간이고 수다를 떨었다. 어른들은 잘 오지 않는 우리들의 유토피아 같던 그 장소들 중 내가 자주 가던 곳은 캔모아였다.
캔모아는 어느 지점을 방문해도 일관되게 이런 느낌으로 꾸며진 곳이었다. 낮은 철제 쿠션 의자들 사이에 흰 테이블보가 씌워져 판유리로 눌러놓은 탁자가 있고, 채도가 낮은 노란색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은 누가 봐도 여고생 취향이었다. 하지만 이 공간 안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따로 있었다.
내가 자주 가던 캔모아는 꽤 자리가 많고, 한 번도 기다리거나 사람이 꽉 찬 적이 없었는데 갈 때마다 앉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던 곳이 바로 이 그네 자리였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느낌으로 천장에서부터 늘어져있고 줄마다 꽃으로 장식되어 있던 꽃그네는 그 넓은 캔모아 안에서도 몇 자리 없어서 항상 인기가 많았다.
천장에 매달려 있어 앉아 있으면 어딘가 자세가 어정쩡해지고, 의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 불편한 기분으로 자꾸 앞 뒤로 흔들게 되던 이 그네는 사실 의자로서의 기능은 꽝이었다. 하지만 눈치싸움 끝에 이 의자를 차지하면 괜스레 신이 나고, 왠지 모르게 분위기 있는 공간에 있는 기분이었으므로 그런 단점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꽃그네에 대한 이 로맨틱한 기억은 고등학교 때 이 곳에서 나에게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데도 말투만은 과감하게 고백을 늘어놓던 어떤 남자아이에게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를 그 아이는, 고백이 성공하자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었다. 여기에 오면 꼭 이 자리에 앉아서 이 말을 하고 싶었노라고. 그 날의 기억이, 그 공간에서 내가 보냈던 모든 순간을 덮어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캔모아를 생각하면 그 아이가 떠오를 정도로 나의 기억 저 편을 가득 채운 순간이지만, 사실 이 곳은 친구들과 가장 많은 시간들을 보냈던 곳이기도 했다. 연유와 시럽이 가득 뿌려진 눈꽃 빙수와 언제까지고 계속 가져다 먹을 수 있었던 생크림과 식빵은 우리가 그곳을 언제고 드나들 이유로는 충분했다.
눈꽃 빙수는 요즘 유행하는 우유 얼음같이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었다. 곱게 갈린 얼음이 정말 눈꽃처럼 접시 위에 예쁘게 펼쳐져 있는 가운데 초코며 딸기 시럽이 무질서하게 흩뿌려져 있고, 과일은 내가 주인공은 아니라는 듯 한편에 조르륵 놓여있었다. 한 입 떠서 입에 넣으면 얼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르륵 혀 위에서 녹아 없어지고, 소다같이 가볍고 상큼한 맛만이 남았다. 그 빙수는 특유의 가벼움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것은 바로 이 생크림과 식빵이었다. 몇 번이고 식빵을 가져다 생크림을 듬뿍 발라 먹어도 눈치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는 역시 캔모아가 최고라며 연신 입을 모아 말했다. 빙수 하나만 시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그 꽃잎 가득한 유토피아에서 우리는 사소하게 행복했다.
꽃그네에 앉아 눈꽃빙수를 먹으며 우리는 다시 올 수 없는 고운 꽃과 같은 시절을 보냈다. 친구들과 식빵에 생크림을 바르며 나누던 끝없는 수다도, 그곳에서 받았던 설익은 고백도 모두 저만의 향기를 간직한 꽃 같은 순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