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사건의 발단은 그저 니코틴이었다.
말보로 뒷면에는 흡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진과 문구가 실려있었다.
단란한 가족사진 속에 아빠의 얼굴만 지워져있었고 아래는
“흡연으로 당신의 아이를 홀로 남겨두겠습니까?”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성 글과 금연 상담 전화번호가 쓰여있었다.
이 아이의 가족사진을 상상해 보았다.
건강을 위해서 좀 줄여보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그 사진이 아이에게 잘 보이도록 들고 있기로 마음을 바꿨다.
“오래 만났어요?”
“응? 어.. 3년쯤?”
“대박. 결혼할 사이?”
“음.. 난 그러고 싶은데 남자 쪽은 아닌 거 같아.”
“헐.. 왜요?”
“모르지 그건.”
“죄송해요. 더 안 물어볼게요.”
“그래. 나도 그 얘긴 안 하고 싶다.”
이번엔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기침의 흔적인지 흉통 때문에 살짝 들이마시니 기침이 나지 않았다.
문득 오늘 입은 트렌치코트와 와인색 매니큐어가 담배를 든 내 모습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먼발치에서 파파라치 컷 한 장 찍어달라고 싶단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근데 말야. 왜 나한테 부탁한 거야?”
“언니가 제일 잘 들어주게 생겨서요.”
딱히 바라거나 예상한 대답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당황스러웠다.
“음. 내가 좀 선한 얼굴인가?”
아이는 좋게 말하면 그렇지만 자기들 말론 호구 상이라고 했다.
“이번엔 위액이 역류하는 듯 가슴이 쓰렸다.”
어떤 사람들을 호구라고 하더라..? 난 정말 호구 같은 인생을 살았나. 그런 근원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빨간 매니큐어 바르면 뭐해요. 언니 딱 봐도 너무 착한 과에요. 하나도 안 쎄 보여.”
그러면서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나 같은 에코 이스트들은 나르시시스트의 먹잇감이 되기 좋다는 말을 종알거렸다.
“이제 언니 무시하는 사람들 있으면 앞에서 담배를 딱, 꺼내 피세요. 나 좀 노는 여자니까 건들지 말라고. 아님 확! 지져버린다, 그런 얼굴 있잖아요.”
“훗, 넌 그렇게 하니?”
“당연하죠. 얘가 나 좀 무시하는 거 같다 싶으면 바로 씨x,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이렇게요.”
“헐.”
“해보세요.”
“응?”
대단히 교양 있거나 고상한 사람도 아니면서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아니 속으로도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다.
엄격한 가정에서 억눌려 자라서 일까. 그냥 이 나이 먹도록 제대로 된 분노도 표출할 줄 모르는 미성숙한 어른은 아닐까.
“야! 이 씨xx아, 너 지금 뭐라고 했냐고..! 이렇게 해보시라니까요?”
벌어졌다 오물 어지기를 반복하는 그 애의 작은 입술에서 상스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아이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후련해진 느낌은 기분 탓일까. 하지만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연습해 볼게.”
아이는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충고를 했다.
“언니, 할 말을 못 하면 가는 데마다 무시당하고요. 친절하면 호구되는 세상이에요. 그리고 남자들도요."
여기선 마치 고급 기밀이라도 되는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착한 여자 별로 안 좋아 한 대요.”
“그럼 아예 총을 가지고 다니는 건 어때? 진짜 되게 못돼 보일 텐데."
“전 칼 가지고 다녀요.”
나는 한 발자국 물러서며 서둘러 웃음을 거두었다.
“이런 후미진 골목에 너랑 나랑 둘만 있는데, 그런 말을 한다고?”
“여기로 데려온 건 언닌데요?”
오늘 제대로 걸렸나 보다. 욕쟁이 골초에서 끝이 아니라 칼까지 소지한 중학생이라니.
“하하 제가 언니 헤칠까 봐요? 제 몸 지키려는 건데요.”
어른을 겁주고 해맑게도 웃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순수한 아이의 웃음이었다.
“너 좀 무서운 거 알지?”
“다 의도한 거예요. 쉽게 보이면 나만 손해니까.”
아무래도 배울게 많아 보이는 아이 같다.
“떡볶이 사줄까?”
“별로요. 아, 담배 피우면 식욕이 없어져서 다이어트에 좋으니까 참고하세요.”
역시... 전수받을게 많은 어린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담배는 내 식욕을 거두어 가지 못했다.
초 단위로 기온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고 분식집의 뜨끈한 오뎅국물을 떠올리니 잠시 미뤄둔 허기가 몰려왔다.
“그럼 순대 먹을래?”
순대는 거부하기 힘들 텐데..
자긴 채식주의자라 순대 같은 건 먹지 않는다고 했다.
젠지들은 환경에 관심이 많다던데 그 말이 맞긴 한가보다. 아니 얘가 젠지가 맞긴 한가 보다.
인생 18회차쯤 되는 줄 알았는데.
아이가 손가락을 튕기자 담배는 현란하게 공중 제비를 몇 바퀴 돌고 바닥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역시 절대로 어디 가서 무시당할 일은 없을 녀석 같다.
“오늘 일은 죄책감 갖지 마세요. 언니가 아니라도 어차피 피웠을 거니까."
마음의 짐을 덜어주어 뭐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하나 생각했다.
“제가 알려드린 거 집에서 꼭 연습하시고요."
라는 말을 남기고 쿨하게 퇴장했다.
그 애가 골목을 빠져나가 코너를 돌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책가방이 큰 건지 등이 작은 건지 모르겠지만 왜소해도 강한 아이 같았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저녁 풍경의 친근한 냄새들 위로 눅눅하고 쌉싸름한 담배 냄새가 추가되었다.
익숙함과 낯섦이 마법처럼 공존하고 있었다.
아이가 떠난 빈 골목에 담배를 들고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낯설게 다가왔다.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담배의 유해 물질들 때문일까.
정말이지 니코틴이 몸속에서 빠르게 번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는 동안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는 어느새 손에 익었다.
마지막 한 모금은 풋풋했던 연애 시절, 연인과 헤어지기 전 마지막 포옹처럼 그렇게 애절하고 아쉽게 들이마셨다.
몽땅해진 꽁초는 방금 버려진 말보로 옆에 떨구었다. 그리고 구두 앞 코로 힘 있게 눌러 비볐다.
납작하게 짓이겨진 담배를 보자 그 위로 김 부장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하, 그 인간의 얼굴도 이렇게 밟아주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매일 아침 여직원들의 복장이며 화장 상태를 스캔하고 그때그때 내키는 사람을 골라 커피 심부를 을 시켰다.
음흉하게 찢어진 그의 눈이 소환되자 관자놀이가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 창을 열었다.
그러나 그에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몰랐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였을까.
그러다 얼마 전 MZ들이 메시지를 선호하는 현상을 두고 "전화 한 통이면 되는 것을 요즘 것들은 예의가 없어"라던 투덜거림이 떠올랐다.
눈도 어두운 어른들더러 귀찮게 타자를 치게 만든다며 늘어놓던 불평까지.
메시지 창을 닫고 연락처에서 김 부장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신호가 이어지는 동안 아이가 떠나기 전 가르쳐 준 말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 방법이 옳지 않다는 걸 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꾹꾹 눌러온 감정들은 작은 균열에도 쉽게 터질 수 있음을 방금 알았다.
억누르고 가둬둔 말들을 쏟아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온다.
하필 그게 지금일 뿐이다.
홍수로 무너진 강둑을 누가 막을 수 있을까.
나는 불가능하다
딸깍.
그가 전화를 받았다.
-끝-
이야기를 마치며.
주인공은 김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했을까요?
아이가 가르쳐 준 욕은 잘 써먹었을까요.. ㅎㅎ
독자 여러분들 각자가 이야기 속 주인공 내가 되어,
대신 김 부장에게 살벌하게,
아주 사정없이 혼쭐을 내주시면 어떨까요.
그래주실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