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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일 Oct 08. 2019

[걸어서 동네속으로] 강릉 간판 일기

작은 동네가 주는 위로

우리가 장소 각각의 특이함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 진정으로 '국지적인(local)' 혹은 진정으로 '지역적인(regional)' 것을 욕망하는 것은 - 우리의 경험이 점점 더 비슷해져 가는 사태에 자극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장소와 함께 얻는 것은 사이트의 편평화 과정에서 잘려나간 바로 그 요소, 즉 독자성, 특성, 미묘한 차이 그리고 역사다.

장소의 운명_에드워드. S. 케이시


사람 냄새나는 동네만이 줄 수 있는 위로.


전주 영화제로 6년간 방문했던 전주와 더불어, 강릉은 요 몇 년 간 힘들 때 찾는 휴양지가 됐다. 무엇보다 왁자지껄한 안목해변만 피하면 조용하게 바다를 볼 수도 있고, 로컬 산업이 성장하고 있는 도시라 조금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가볼만한 괜찮은 공간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젠 나에게 필수코스가 돼버린 강릉의 #버드나무브루어리 그리고 #교동반점 은 여행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여유 부리는 느낌은 언제나 좋다. 평소였으면 일을 했을 시간대에 낯선 카페에 앉아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것.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늘 피했지만 눈치 볼 사람도, 잘 보일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느긋이 앉아 맥주를 마시는 것... 여행지에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이국적인 풍경과 더불어 일상적인 시간에 즐기는 여유 때문이 아닐까? 나는 강릉에서 이렇게 일상을 깨트리고 낯선 여유를 즐긴다.

테라로사 경포호 수점. 뙤똑 홀로 앉아 책 읽던 이가 있었다. 호수에 책은 좋은 안주다...

이탈리아 동네를 여행하고 처음으로 찾는 강릉이었기에 나름의 기대도 됐다. 여유롭기는 해도 나름의 코스를 정해서 움직였던 지난번의 강릉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코스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를 제외하곤 식당, 관광지 주변을 무턱대고 걸었다. 덕분에 벌써 4번째인 강릉여행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여행하는 방법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훨씬 넓어진 느낌이었다. 강릉도, 내 여행도.


첫날밤, 버드나무 브루어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숙소에서 먹을 닭강정을 사러 시내로 향했다. 전 같았으면 버스나 택시를 이용했을 텐데, 그날은 무작정 걷고 싶었다. 강릉에서 제대로 된 동네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동네로 흘러들어 골목을 헤맸다.

금요일 밤, 동네는 조용했다. 이따금 학원 끝난 학생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걸었다. 주택가는 조용했다. 아홉 시 무렵, 가게들은 묵묵히 마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영업 중인 동네 카페와 호프집에서는 온기가 전해져 왔다. 나는 서울에서와 다를 것 없이 간판을 모았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었다. 찍을만한 간판이 천지에 널려있는, 노다지 동네였다.

진짜 사람 냄새나는 동네엘 가야만 받을 수 있는 위로가 있다. 우리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벼락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데 이런 동네에 와 무던히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뭐랄까, 삶의 스펙트럼은 이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사연과 직업만큼이나 많구나 하는 위로. 벌이나 계층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시끌시끌 왁자지껄한 서울에, 그것도 도심 한복판에 오래 있다가 이런 조용한 곳을 거닐어 보면 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건 단지 많고 많은 규정 중에 하나가 아닐까?

동네에서 한 두 번 길을 잃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 동네의 구성원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꿀까? 시내에 도착하자 가로등 불빛으로 거리가 환해졌다. 아는 길이 나오자 '이곳이 이렇게 이어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판은 이미 모을만큼 모았다.

 이 숨죽인 동네에서 간판을 찍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간판은 그들만의 감성을 담고 있다. 간판은 이름이고, 정체성이고, 그들의 감성이니까. 그래서 난 어딜가나 간판을 먼저 본다. 전부 똑같아 보인다고? 그렇다면 걷는 걸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시라. 간판은 제각기 다르고, 재밌기까지 하다. 동네는 이렇게 같은 듯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경포대 모래 위에서 파도를 맞으며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는 일도 꽤나 고무적이었지만, 내게는 이 동네 여행이 강릉에서 가장 즐거웠던 일이다.

간판을 모으는 동안 문득 서울의 골목과 동네가 그리워졌다. 이곳의 고요함만큼 서울의 번잡함이 그리웠달까? 여행은 이렇게 전혀 닿지 못했을 것들을 이어준다. 태어나 처음으로 오는 동네에서 이상한 위로와 동질감을 느끼고, 비슷한 한국식 주택과 아파트 사이에서 다름을 발견한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의 삶을 상상하는 일까지. 동네 여행은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게 만들고, 그곳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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