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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일 Mar 03. 2019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아마추어다.

타인의 그림자가 아닌, 나로 사는 이야기.

3월은 항상 피치 못한 감상이 튀어나온다. 학교를 안 가도 노천극장에서 불던 병나발, 자랑삼아 떠들어댔던 시답잖은 연애 이야기가 여전히 혈관을 타고 돌아다닌다. 그러고 보니 막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로케이션에서 편집까지 모두 혼자 감당하고 홀로 앉은 편집실에서 끝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더랬다.

 

 그해 여름에는 첫 연애에 실패했다. 이별의 사유와 내 영화 제목은 아주 정확하게 일치했다.

 "쿨하지 못해 미안해"

 아픔을 잊기 위해 부천 영화제를 찾았다. 거기서 아주 재미난 영화를 발견했다. 영화를 예매한 것도 순전히 호기심을 유발하는 제목 때문이었던,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

금요일, 평범한 고교에 파문이 일어난다. 몸매와 얼굴, 운동까지 섭렵한 키리시마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 현 대표로 선발될 정도로 배구를 잘하는 그가 배구 동아리를 그만둔다는 소문도 퍼진다. 이야기는 키리시마의 세 절친에서 그의 여자 친구 리사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운동이나 연애가 머나먼 행성의 이야기인 애들도 있다. 영화 동아리를 이끌고 있는 마에다 무리가 그렇다. 마에다는 로메로의 좀비 영화를 동경하는 B급 영화팬으로, 예선에 통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비슷한 청춘 멜로 영화를 고집하는 동아리 선생을 못마땅해한다. '주제는 반경 1m 안에서 찾아라, 이를테면 연애라든가'라는 선생의 말을 듣고 질색하는 그들.


[키리시마가 동아리활동 그만둔대]의 주인공은 키리시마가 아니다. 내러티브 속에서 그는 살아 숨 쉬지만, 영화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것은 그의 절친 히로키와 영화부 마에다다. 그들은 하나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그려지는데, 히로키는 키리시마에 버금가는 킹카, 마에다는 반에서 눈에 띄지 않는 범생이다.  

히로키는 키도 크고, 사나라는 여자 친구도 있다. 그는 야구부 소속이었지만 이제 나가지 않는다. 어쩌다 마주친 주장은 시합이 있으니 나오라는 말만 한다. 히로키는 야구부에서도 주목받는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그에게는 키리시마의 행방이 더 중요하다. 히로키는 키리시마의 그림자다. 키리시마라는 인물 옆에 있을 때 히로키는 그의 일부다. 히로키와 함께 다니는 두 명의 친구들은 키리시마가 학교에 나오지 않자 농구를 하며 그들 자신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왜 농구를 하고 있지?"

"키리시마를 기다리기 위해서였잖아."

"그냥 농구가 재밌어서 하는 건데?"

"바보, 그럼 농구 동아리나 드시지 그래."

그들은 마치 공생관계로 서로를 인식한다. 키리시마가 없으니 그들이 농구를 할 이유도(나아가 그들의 존재도) 희미해진다.

한편, 키리시마의 부재는 배구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 에이스의 부재는 모두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No.2는 리사에게 따져보지만 헛수고다. 키리시마 대신 서브 리시브를 맡게 된 고이즈미는 작은 키와 체구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키리시마처럼 공을 받아낼 수 없다. 키리시마의 여자 친구, 리사를 따르는 미야베는 친구들에게 비웃음 당할까 봐 고이즈미를 좋아한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맨날 배드민턴을 하면서 배드민턴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리사를 따르는 여자애들은 다 리사 눈치를 본다. 그들 또한 하나의 공생관계로 리사에게 의존한다.

그에 비해 마에다는 꿋꿋하게 나아간다. 순풍을 만난 범선처럼 마에다는 좀비물이라는 장르를 만나 진지하게 영화를 찍는다. 중간중간 로케이션에 다른 이들이 있는 어려움도 겪는다. 남에게 말 한마디 못하던 마에다는 끝내 그들에게 비켜달라고 한다. 그는 영화 만드는 행위를 통해 안팎으로 자기를 드러낸다. 하지만 아직 최대 난관이 남아있다. 클라이맥스 촬영을 옥상에서 하던 중 키리시마를 옥상에서 봤다는 히로키 일행을 따라 배구부와 여자애들이 올라온 것이다. 그러나 무리가 발견한 것은 교복을 입고 있는 좀비들이었다.


"싸우자, 이곳이 우리들의 세계다."

 키리시마를 놓친 배구부 No.2는 영화부가 소중하게 만든 유성을 발로 걷어찬다. 마에다는 이를 보고 사과하라고 하지만 되려 멱살이 잡힌다. 그는 좀비들에게 이 무리를 공격할 것을 명한다. 마에다는 8mm 카메라로 그 광경을 담아낸다. 그의 시점으로 본 뷰 파인더에서, 배구부와 다른 애들은 로메로의 좀비물에 나온 진짜 좀비들에게 잡아먹힌다. 카메라의 눈을 통해 꿈이 이미지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현실의 좀비들은 배구부에게 모두 제압당한다. 키리시마는 영화 내내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부를 제외한 모두가 옥상에서 물러난다. 마지막으로 히로키는 떨어진 카메라 렌즈를 마에다에게 건네며 묻는다.

"성공해서 여배우와 결혼도 할 건가요?, 아카데미도 수상하고?"

"절대 무리!"

마에다는 영화감독으로 성공하는 게 무리라고 말한다. 자신도 그걸 알고 있다는 듯 웃기까지 한다. 근데 영화는 왜 찍냐는 히로키의 물음에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그리면서 영화를 촬영하는 데에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히로키는 야구부 주장과도 만난다. 귀가 중 야구부 주장이 밤늦게 혼자 훈련하는 모습을 본 적 있는 그는 3학년이면 은퇴할 때도 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주장은 자신이 한 번도 드래프트 된 적이 없으며, 그런 기대도 없지만... 그래도 신인 드래프트까지는 야구를 할 거라고 말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인가!


끝없이 같아지기를 요구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심지어 유행에서 벗어나는 것도 일종의 유행인 사회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는 어렵다. 취업을 하고 나면 생계를 위해, 내 몸과 건강을 위해 지켜오던 세계를 뿌리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계를 위해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름을 알리거나 크나큰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최고가 아니어도 무언가를 열심히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안다. 그 지난한 여정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마 야구부 주장은 드래프트에 뽑히지 못했을 것이고 마에다 또한 일반 대학에 가서 공부나 열심히 할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히로키와는 다르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아닌,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일 새벽녘 출근 인파로 북적이는 지하철에 몸을 맡길지라도, 이 세상에 수많은 덕후들이 존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아마추어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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